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로필 (슈퍼 발롱도르) :: 외시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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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로필 (슈퍼 발롱도르)

by 두용이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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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로필 (슈퍼 발롱도르)

이름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Alfredo Di Stéfano
본명
알프레도 스테파노 디스테파노 라울에
Alfredo Stéfano Di Stéfano Laulhé
출생
1926년 7월 4일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2014년 7월 7일 (향년 88세)
국적
아르헨티나 | 콜롬비아| 스페인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유틸리티 플레이어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45~1949)
 CA 우라칸 (1945~1946 / 임대)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1949~1953)
레알 마드리드 CF (1953~1964)
RCD 에스파뇰 (1964~1966)
감독
엘체 CF (1967~1968)
CA 보카 주니어스 (1969~1970)
발렌시아 CF (1970~1974)
스포르팅 CP (1974)
라요 바예카노 (1975~1976)
CD 카스테욘 (1976~1977)
발렌시아 CF (1979~1980)
CA 리버 플레이트 (1981~1982)
레알 마드리드 CF (1982~1984)
CA 보카 주니어스 (1985)
발렌시아 CF (1986~1988)
레알 마드리드 CF (1990~1991)
국가대표
 6경기 6골 (아르헨티나 / 1947)
 4경기 (콜롬비아 / 1949~1952)
 31경기 23골 (스페인 / 1957~1961)

 

 

스페인 국적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자 레알 마드리드 CF 명예 회장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 자체를 함께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떨쳤고 50년대 중반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단하여 60년대 중반까지 활약하며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비롯해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당대의 레알 마드리드 CF로 하여금 "저승사자 군단"이라는 칭호를 얻게 만들었다.

 

201477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인근 거리를 걷던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했다.

 

축구인 경력

레알 마드리드 CF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메렝게스의 흰 유니폼만을 입는 것이 확정된 디 스테파노는...

 

적응기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29골을 몰아치며 데뷔 시즌 피치치를 가져감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의 3연패를 저지하고 트로피를 마드리드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해에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주도 아래 차곡차곡 스타 플레이어를 더해 주기 시작, 이른바 '저승사자 군단'을 결집시킨다. 1956년에는 '나폴레옹' 레몽 코파를 영입했고, 1957년에는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센터백 호세 산타마리아가 들어왔으며, 결정타로 1958년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파트너로 '폭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를 영입했다. 이들은 죄다 당대 최고로 꼽히던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단적으로 레프트 윙 프란시스코 헨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을 정도로 스페인에서 제일 가는 드리블러였고, 레몽 코파는 1958년 발롱도르를 챙겨 갔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 땅에 레알 마드리드를, 아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라는 악마의 조합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그 두 명을 최전방에 내세운 마드리드는 라리가 우승 8를 거두었고, 디 스테파노는 그 와중에 피치치 5, 발롱도르 2를 달성했다. 라리가 득점왕 5회와 MVP 4회는 그저 부록일 뿐이다.

 

그렇게 1964년까지 마드리드의 모든 영광을 함께 하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찾아오자 37살에 RCD 에스파뇰로 이적한다. 그리고 말년 중 말년에도 47경기 11골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후, 그 영광스러웠던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참고로 하필이면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인 에스파뇰로 이적해서 바르셀로나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에스파뇰에서 라리가 초기의 라이벌이자 아주 잠깐 팀 동료이기도 했던 라슬로 쿠발라와 재회했다. 그래서 이 부분이나, 애초에 에스파뇰 창단을 FC 바르셀로나 쪽 인사들이 카탈루냐 축구 협회의 지원 형태로 후원한 것과 관련해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도가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적 대립 문제라는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라리가는 2007-08 시즌부터 디 스테파노를 기리고자 시즌 최우수 선수에게 그의 이름을 딴 '트로페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수여하고 있다. 최초 수상자는 라울 곤살레스이며 최다 수상자는 리오넬 메시이다.

 

국가대표 경력

194721세의 나이에 현재의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해 7경기 6득점으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도자 경력

1964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RCD 에스파뇰에서 두 시즌 간 활약 이후 선수생활에서 은퇴한다. 디 스테파노는 은퇴 이후 여러 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모국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에서 리그 우승을, 1970-71 시즌에는 발렌시아 CF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1979-80 시즌에 발렌시아로 다시 돌아와 UEFA 컵 위너스 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1982-83 시즌에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UEFA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잠깐 존속했던 코파 데 라리가에서 모두 마지막에 미끌어지며 5개 대회 준우승을 기록했고, 결국 다음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이후 보카 주니어스, 발렌시아 CF에서 다시 감독을 맡았다.

 

그러다 1990-91 시즌, 존 토샥 감독이 경질된 이후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시즌 시작이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엘 클라시코였다. 그것도 그냥 엘 클라시코도 아닌 무려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였다. 이 대결은 디 스테파노의 레알이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멀티골 대활약에 힘입어 1, 2차전 모두 승리를 거뒀고, 합계 5-1로 우승에 성공해 디 스테파노가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3월에 접어들며 리그에서 3연패에 이어 유러피언 컵 8강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게 1-3으로 패배해 탈락하고 4연패를 거두자 결국 경질되었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는 199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은퇴한다.

 

플레이 스타일

https://youtu.be/JVuWrJJWNk8

 

https://youtu.be/tr4ZnruKAsY

 

 

완전무결. 디 스테파노를 정리하는 한 단어이다. 디 스테파노는 강력하고 빠르고 기술적이고 다재다능한 선수였고 체력, 전술적 다양성, 창의성, 시야 등을 지녀 경기장 모든 곳에서 경기 할 수 있었다.

 

신체 밸런스는 경이로웠고, 몸놀림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경기 90분 간 내내, 선수 생활 20년 간 내내 무한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금빛 화살이라는 별명답게 유려하고 빠르게 공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러면서도 공격이든, 중원이든, 수비진이든 전 경기장에 관여하고, 또 모든 포지션을 최고 수준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공격하고 수비하고 패스하고 전투하듯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것을 20년 간 지속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선수였다. 키도 178cm로 당대에는 장신 축에 속했다.

 

축구 황제 펠레와 에우제비우, 디에고 마라도나 등에게서 역대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수이기도 하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근대 축구를 정립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가 현대 토탈 풋볼의 키워드 중 하나인 포지션 파괴를 1950년대에 보여줬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디 스테파노가 있는 팀은 포지션 당 2명의 선수가 있는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그라운드 전체를 커버하며 뛰어다니는 선수였다. 이런 범용성 때문에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따라서 주 포지션을 하나로 단정짓기가 곤란한데, 당대 축구의 특성상 그에게도 공격수가 최고의 포지션이긴 했으나 미드필더로서도 매우 많은 경기를 소화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전설 바비 찰튼은 유러피언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했을 때[20] 벤치에서 처음 목격한 디 스테파노에 대해 골키퍼에게서 볼을 받고, 풀백에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장의 모든 곳을 지켜보며 영향력을 미쳤다는 감상을 남긴 바 있고,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이자 당시 FC 바르셀로나 감독을 역임한 엘레니오 에레라도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최고의 수비수이다."라고 했다. 또한 미겔 무뇨스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디 스테파노를 한 팀에 두는 순간, 당신은 12명을 데리고 경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라는 말로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그리고 공식 경기에선 보여주지 않았지만, 골키퍼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21] 공수 가리지 않고 경기장 전체를 뛰어다니다가도 골을 폭풍처럼 몰아쳐 저 스탯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22]

 

평가

2013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역대 베스트  11

 

 

골닷컴에서 선정한 1960년대 최고의 선수에서 2위에 이름을 올렸다.

 

흔히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의 경력만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그 이전에도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였는데, 페렌츠 푸스카스와 더불어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라고 할만하다. 요컨대 무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의 정점에 있던 선수로, 요즘으로 치면 1999-00~2001-02 시즌 즈음에 데뷔해서 지금까지도 메시나 호날두와 동급의 활약을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 또한, 서른을 넘기고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접수한 선수는 지금까지도 디 스테파노와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뿐이며 초대 시상식이 열린 1956년에도 3표 차로 2위에 올랐는데 이때의 수상자는 41세의 이미 전성기가 지난 스탠리 매튜스로 공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초대 수상이 돌아갔을 뿐 실질적으로 이 시즌의 유럽 최고의 선수는 디 스테파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펠레의 등장 이전까지 디 스테파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었으며, 펠레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펠레에 이은 역대 2위를 마크하고 있었다.[23][24] 당장 1990년대의 축구 관련 서적만 봐도 디 스테파노의 평가는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TOP 3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남미와 유럽 리그를 모두 경험하였고 평정하였지만 FIFA 월드컵 경력이 없는 디 스테파노, 브라질 리그와 월드컵만 보면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유럽 리그 경험이 없는 펠레, 남미에서도 유럽에서도 월드컵에서도 활약했지만 각각을 상대와 비교해보면 어딘가 다소 부족한 마라도나의 구도가 짜여졌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크루이프나 베켄바워 혹은 미셸 플라티니는 언급도 없었다. 또한 1970, 1981년도 기자단 역대 베스트 11에서 크루이프는 디 스테파노에게 밀렸으며, 1989년 슈퍼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를 모두 제치고 수상함으로서 유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임을 공인받았다.[25]

 

다만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일단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인데, 월드컵에서 못한 것이 아니라 월드컵 출전 자체를 못했다. 심지어 그 이유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월드컵 취소, 조국의 본선 진출 실패, 국적 문제, 부상 등등 버라이어티했으며 운이 지독하게 나빴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순위에서 위 4명과 플라티니에 이어 6위에 랭크되었으며 2017년 부트발, 포포투 선정 역대 탑 100 플레이어에서 부트발에서는 역대 5, 포포투에서는 역대 6위로 평가하였다.[26] 리스트를 보면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이 100명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월드컵 활약이 미미했던 선수는 있어도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는 한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그 월드컵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로서 전체 6위라는 최상위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발롱도르만 4번 연속으로 수상, 트레블만 2번에 월드컵 골든볼까지 수상한 리오넬 메시조차도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펠레나 마라도나와의 비교에서 발목을 잡히는 마당에[27], 고작 A매치 30경기에 월드컵 0경기인 국가대표 경력을 가지고 이 정도 평가를 받으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클럽에서의 엄청난 커리어를 비롯해서 보여준 퍼포먼스가 다른 선수들과 급을 달리 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디 스테파노는 단순히 커리어를 넘어 기량 자체로는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현재도 올드 축구인들 사이에서 커리어는 몰라도 개인기량으로써는 메시, 펠레, 마라도나보다 디 스테파노가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마라도나가 처음 등장했을 때 디 스테파노급으로 평가받는 등 최고의 개인 기량을 가진 선수의 상징격 인뮬이었다. 따라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활약이 전무하다는 한계가 있으나 그 한계를 가진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유러피언 컵의 제왕

 

 

1955, 드디어 유럽 대륙의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 컵, 즉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격 대회가 시작된다. 축구 팬들은 스페인 무대를 먹어치워 버린 레알 마드리드와 디 스테파노가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통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을 보냈으나... 저승사자 군단의 유럽대항전 도전은 유러피언 컵 5연패로 귀결되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있었고, 디 스테파노는 1959-60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 해트트릭을 비롯해 5년간 결승전에서만 5경기 7골 및 5년 연속 골, 득점왕 2회 수상 등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 발롱도르 2회 정도는 오히려 부족한 헌사였다.[29] 유러피언 컵 통산 득점은 58경기 49골로, 라울 곤살레스가 깨기 전까지는 수십 년 동안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으며 경기당 0.84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 여담으로 1960421일에 열린 유러피언 컵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회 100호 골을 득점했는데,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FC 바르셀로나였다.

 

게다가 그가 유럽에 온 것이 나이 29살 때였다. 즉 챔스 5연패의 전성기를 30대에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30 넘으면 슬슬 에이징커브 걱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는 50년대 선수였다.

 

또한 당시 유러피언 컵과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가 현재 클럽 축구계에서 최고 대회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회가 정립되는 초창기 시절부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슈퍼 스타의 미친 활약도 주요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를 현대 클럽 축구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그가 마드리드에서만 쌓은 커리어만 봐도 라리가 우승 8, 코파 델 레이 우승 1, 유러피언 컵 우승 5, 피치치 5, 라리가 MVP 4, 유러피언 컵 득점왕 2, 발롱도르 2회 등이다.

 

특히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록한 스탯을 보자. 라리가에서만 282경기 227골을 넣었으며, 이런 저런 대회를 다 합치면 총합 307골이다. 307골은 2009년 말 라울 곤살레스가 경신하기 전까지 50여 년을 내려온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다. 전설이 전설을 계승한 것이다. 그를 빼놓고는 절대 레알 마드리드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현역 시절 엘 클라시코에서만 18경기 18골을 때려 넣으며 그야말로 FC 바르셀로나 킬러로 군림하였다. 앞서서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와 협상을 맺고 태업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이유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확정된 이후, 특히 그 직후의 엘 클라시코에서부터 폭발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걸출한 공격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거쳐갔음에도, 엘 클라시코 18골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깨지기는커녕 추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독보적인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근 반 세기가 되어서야 그가 올랐던 반열에 오른 라이벌 팀 선수에 의해 깨졌다. 그 이전에는 라울만이 어느 정도 근접했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영향력은 죽은 적이 없었다. 2010-11 시즌 끝자락에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떡실신당한 것으로 구단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쟤들이 더 낫네 이 한심한 것들아'라는 식의 일갈로 구단 프런트 및 선수단 모두를 데꿀멍시켰다. 심지어 말빨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주제 무리뉴 감독조차...

 

다만 요한 크루이프나 프란츠 베켄바워같은 이후의 천재들이 역시 각각 FC 바르셀로나와 FC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며, 클럽의 위기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마드리드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할 디 스테파노 옹은 되려 마드리드 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 너무 팬들의 입장에서만 프론트 및 선수진을 대하다 보니, 무리뉴 감독 및 선수들과의 대립이 눈에 띄었던 편이다. 이런 점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역시 마찬가지인데, 크루이프의 이야기는 편견이건 고집이건 간에 자기 나름의 전술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자기가 몸 담았던 팀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은 좋지만, 과거의 향수에 취해 현재의 모습을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빗대어 끊임없이 깎아내리기만 하던 모습은 팬으로서나 제3자로서나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

 

월드컵 불운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쥐스트 퐁텐

 

쥐스트 퐁텐도 언급했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에 단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펠레 혹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말하지만, 월드컵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갉아먹은 이유가 되었다. 펠레가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마라도나 지지자들에게 까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31]

 

그런데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위대한 선수가 불운으로 월드컵을 못 나갔다고 하면 허약한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인 경우가 대부분인데,[32]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소속되었던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이고, 양쪽 모두 상급이거나 혹은 최상급 전력이었다. 본인의 실력 역시 그런 팀에서 주전으로 뛰기에 문제가 없었고, 적응기 따위 없는 건 국가 대표로서도 마찬가지여서 스페인 소속으로 치른 데뷔전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못 나갔느냐 하면...

 

일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프로 입단한 것은 1943년이었다.

  • 1946년 월드컵: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열리지도 못했다.
  •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1938년 월드컵 개최권 분쟁에 더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분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의 이중국적이었고, 이 직전까지는 어느 국적을 가지고 있든 출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34]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부터 규정이 꼬이기 시작했고, FIFA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어느 국적으로든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이때에는 1957년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상황이어서 스페인 국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디 스테파노는 전성기를 맞아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을 쓰고 있었고, 이 시기 스페인은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라슬로 쿠발라 등 최상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지역 예선에서 스코틀랜드에 밀려 귀신 같이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 1962년 칠레 월드컵: 이때에도 스페인 대표 팀의 전력은 최상이었고, 당시 나이 36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도 국가 대표팀에 속해서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생각뿐인 상황이었다. 지역 예선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이젠 정말 본선 경기에서 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본선 개막전 직전에 치른 경기에서 부상당한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본선 경기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월드컵 직전에 40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허리 부상을 당했고, 결국 은퇴했다.

 

기록 - 선수

대회 기록

  • CA 리버 플레이트 (1945~1949)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45, 1947
    • 코파 닥터 리카르도 알다오: 1947
  •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1949~1953)
    •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 1949, 1951, 1952
    • 코파 콜롬비아: 1953
    • 코파 보다스 데 오로 델 레알 마드리드: 1952
  • 레알 마드리드 CF (1953~1964)
    • 라리가: 1953-54, 1954-55, 1956-57, 1957-58, 1960-61, 1961-62, 1962-63, 1963-64
    • 코파 델 레이: 1961-62
    • 유러피언 컵: 1955-56, 1956-57, 1957-58, 1958-59, 1959-60
    • 인터컨티넨탈컵: 1960
    • 스몰 클럽 월드컵: 1956
    • 라틴컵: 1955, 1957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1947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57, 1959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슈퍼 발롱도르: 1989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47
  •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 득점왕: 1951, 1952
  • 라리가 득점왕: 1953-54, 1955-56, 1956-57, 1957-58, 1958-59
  • 유러피언 컵 득점왕: 1957-58, 1961-62
  • 스페인 올해의 운동 선수: 1957, 1959, 1960, 1964
  •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1964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베스트 XI: 2012, 2017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UCL 베스트 XI: 2018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 FIFA 공로장: 1994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FIFA 100: 2004
  • 골든풋: 2004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아르헨티나 드림팀: 2021
  • 아스 역대 베스트 XI: 2021

 

슈퍼 발롱도르

 

기록 - 감독

대회

  • CA 보카 주니어스 (1969~1970, 1985)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69 N
    • 코파 아르헨티나: 1969
  • 발렌시아 CF (1970~1974, 1979~1980, 1986~1988)
    • 라리가: 1970-71
    • 세군다 디비시온: 1986-87
    •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1979-80
  • CA 리버 플레이트 (1981~1982)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81 N
  • 레알 마드리드 CF (1982~1984, 1990~1991)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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