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프로필 (브라질 축구 황제)
뉴욕 코스모스 명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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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C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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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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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Pel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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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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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
Edson Arantes do Nascimen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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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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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0월 23일 (8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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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합중국 미나스제라이스 주 트리스 코라송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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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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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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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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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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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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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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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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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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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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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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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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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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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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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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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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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경기 77골 (브라질 / 1957~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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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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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 1녀 중 첫째, 슬하 2남 5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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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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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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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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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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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축구선수. 포지션은 공격수다. 본명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로 펠레(Pelé)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FIFA 월드컵에서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로, IOC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되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항상 꼽히는 전설적인 선수로, 그 엄청난 실력으로 대단한 커리어를 쌓으며 세계 축구계에 이바지한 공을 대중에게 인정받아 ‘축구 황제’(The King of Football)'라는 칭호를 얻었다. 오죽하면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선수 생활 당시에 유럽 구단의 펠레 영입을 막기 위해 그를 국외 반출 불가의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생애
어린 시절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조차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 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그와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기야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그걸로 게임 끝.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18]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딩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딩으로만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19]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파일럿을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펠레는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한편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21]를 데려왔다.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 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22]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23]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부라는 인물은 멘탈이 완전히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들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도 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펠레의 가방을 빼앗아 다시 방 안에 던져 넣었다.
페널티 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 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 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 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선수 경력
클럽 경력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국가대표 경력
은퇴 이후
펠레는 축구 선수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했다. 이후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하는 등 축구 협회와 클럽들의 회계를 투명화하려 노력했으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
2021년 12월 기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최다 득점자(1283골)" 문구가 있는데 이는 실제 기네스 등재 기록이며 비공식적 기록이다.
투병
2015년에는 노환이 찾아왔고, 각종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 때문에 우울증까지 찾아왔지만 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2020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폐와 간에도 종양이 발견되어 항암 치료 중이다. 2022년 들어서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다.
2022년 12월 3일, 브라질 언론사 FOLHA에선 펠레는 더 이상 항암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며 임종치료[27]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고령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의 생애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 확실시되기에 현재 카타르 월드컵을 치르는 중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겐 자국의 월드컵 3회 우승의 영웅이자 축구계 GOAT를 위한 우승 동기부여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8년 전 사망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6년 전 사망한 요한 크루이프, 2년 전 사망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어 또 다른 올타임 레전드를 보내줄 준비를 해야 한다며 슬퍼하고 있다. 킬리안 음바페 역시 트위터에 응원의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본인은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내가 에너지로 가득 찰 수 있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난 카타르 월드컵 브라질의 경기도 볼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며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피력했다.
기록
대회 기록
산투스 FC (1956~1974)
- 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29]: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 NASL: 1977
- 사커보울: 1977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58, 1962, 1970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959
개인 수상
- FIFA 발롱도르 명예상: 2013
-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참고] [31]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58[3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7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33]: 2000
- FIFA 공로장: 1984, 2014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5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5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3[34]
-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1965
- 인터컨티넨탈컵 득점왕: 1962, 1963
- NASL 올스타팀: 1975, 1976, 1977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WA 공로상: 2018
- 볼라 지 프라타: 197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타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35]: 1999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 BBC 올해의 해외 스포츠 스타: 1970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평생 공로상: 2005
- 로이터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OC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FFHS 20세기의 선수: 1999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브라질 드림팀: 2021
- 아스 역대 베스트 XI: 2021[36]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수훈
- 대영제국 훈장 2등급 (KBE): 1997
개인 기록
- 한해 최다골 : 1959년 127골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득점: 2경기 3골[37]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도움: 3개[38]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공격포인트: 2경기 3골 3도움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14경기 12골 10도움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14경기 10도움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경기 7도움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토너먼트 최다 득점: 6골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해트트릭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우승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출전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결승전 득점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2회 우승 (1962, 22세)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프리킥 골이자 유이한 두 대회 연속 프리킥 골 2골 (1966, 1970)[39]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연속 대회 득점 4대회 (1958, 1962, 1966, 1970)[40]
- FIFA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10-10(10골 이상, 10도움 이상)을 달성한 선수[41]
- 코파아메리카 통산 역대 최연소 득점왕 (1959년 만 18세 6개월 6경기 8골)
- 코파아메리카 통산 역대 최연소 MVP 수상 (1959년 만 18세 6개월)
-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모두 3골 이상 득점하고 우승한 선수
- 인터컨티넨탈컵 통산 최다 득점 3경기 7골 (1962, 1963)
플레이 스타일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모든 능력이 정점에 가까운 완성형 선수다. 최근 들어 멀티 플레이어나 육각형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약점이 없다'는 표현이 남용되고 있지만, 펠레는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패싱 능력을 활용하여 많은 기회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골 결정력도 우수하여 직접 해결사 역할도 했다. 심지어 공중 경합 능력도 최고 수준인데다 수비 가담까지 했으니 모든 부분이 완벽했던 '컴플리트 포워드'라 불리기 제격이었다.
펠레의 높은 득점 기록 때문에 그를 전형적인 골게터로 착각하기 쉽지만, 펠레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공격형 미드필더라 칭했을 정도로 미드필더적인 성향이 있는 선수였다.[68] 실제로 이 링크처럼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당시 펠레의 포지션은 브라질에서 Ponta de Lança(창날)이라 불렸던 포지션이다. 이 창날 포지션은 빠르고 날렵한 드리블로 라인을 부순 뒤, 창처럼 침투해서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때때로 3선까지 내려와 박스 사이를 휘저으며 중원 장악을 돕기도 했다. 현재의 전술 및 포지션과 완전한 1대1 대응은 어려우나, 굳이 연관짓자면 지금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펠레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던 전문가들은 발롱도르 드림팀을 선정할 때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로 분류했다.[69] 이에 대해 축구 역사 매니아를 제외한 많은 축구팬들은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70]
펠레의 저주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명성이 자자한 펠레이지만 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말을 하면 언제나 그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펠레의 저주 때문이다. 이놈의 저주 때문에 평생동안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저 이건 농담삼아 하는 얘기니 너무 진지하게 펠레를 까는 건 자제하자. 틀린 것이 부각돼서 그렇지 정확하게 예측한 것도 많기 때문.
어쨌든 펠레의 저주 희생양들에겐 흑마법사라고 왕창 까인다. 이게 펠레의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펠레가 무언가를 예측할때마다 지목당한 선수들의 팬들은 그만좀 하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펠레가 월드컵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자 펠레를 까면서 펠레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까지 세트로 까였고,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개드립을 듣고도 기겁한 쪽은 오히려 네이마르의 팬들이었다. 메시팬들은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마저 있는데 실제로 한마디 했다가 네이마르는 매 경기마다 부진했고, 반면 메시는 귀신처럼 골을 넣으면서 MVP 골든상도 수상까지 했다. 여담으로 펠레는 자국 월드컵 직전에 아르헨티나는 팀이 엉망이고 메시를 3류 선수라며 혹평까지 했다. 그런데 월드컵 본선에서 온갖 하드캐리하면서 자국팀을 결승전까지 올렸다. 비록 준우승 했지만 골든볼까지 수상도 받았다.
여담
-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펠레의 선수 시절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거나 퇴장을 당하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투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 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투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투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실제 경기로는 1964년 1월 19일, 산투스 FC와 그레미우의 타사 브라지우 4강 2차전에서 경기 86분에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다. 산투스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로 뛰게 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 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로도 여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고 결승으로 이끌었다.참고하면 좋은 에펨코리아 글 이런 식으로 펠레가 골키퍼로서 뛴 기록은 놀라운 수준이다. 공식 경기와 비공식 경기를 합쳐 골키퍼 대신 뛴 경기가 7경기나 되는데, 실점은 단 한 개 뿐이다.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물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게다가 본인의 서브 포지션이 골키퍼였기 때문에 골을 먹었을 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SL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164]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토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명예 KBE훈장을 받았다. 2등급 훈장이기 때문에 작위급 훈장이다. Sir칭호가 안 붙는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유일한 KBE 수훈자이다.[165]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펠레가 청소년일 적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기에 그는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166]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는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다고 한다.
- 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히고 있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를 한다.[167]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은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를 만났다. 당시 물이 올라와있던 펠레는 자신만만해 했으나, 브라질은 승리하긴 했지만 고작 1골을 넣는 데 그쳤다.[168] 참고로 이 경기서 잉글랜드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펠레의 골이나 다름없는 슛을 막아내는 등 역대급 선방들을 보여줬다. 경기가 끝나고 펠레는 "잉글랜드 골문은 은행(Banks)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라는 드립을 남겼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두 획이나 그어버린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169]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1986년에는 핫샷(Hotshot)이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형편없던 실력의 한 젊은 미국 리그 축구선수가 펠레를 찾아가 수련을 받은 후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선 SBS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013년 FIFA 발롱도르를 수상하면서 펠레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펠레가 뛰던 당시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수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펠레는 그런 활약을 하고도 수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은 3번째 명예 발롱도르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아닌 프랑스 풋볼[170]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171]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172]에 펠레가 게스트로 초정된 적이 있었는데[173],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마라도나가 먼저 헤딩 대결(서로에게 헤딩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하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
- 현재 80세가 되었지만, 아직 크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안속성을 지닌듯 하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16년 3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3000만달러(한화 약 350억원)의 소송을 걸었다.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 한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대한뉴스 친선 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투스 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을 맡아 방한했다.
- 바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 소년일 뿐이었는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했던 주제 아우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174]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티유는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아야 했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같은 스타선수나 달 수 있었던, 중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 스트라이커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는데,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입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대표로 뛰었던 당시에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다.
-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펠레는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 2016년에 '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 유명한 배우도 출연했고, 펠레의 가족들이나 펠레 역할의 배우는 실제로 브라질인을 캐스팅하였다. 펠레의 어린 시절 삶과 1958년 월드컵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가린샤가 펠레보다 키가 큰 점 등 잘못된 고증이 조금 있지만, 펠레의 유년기 삶과 브라질 축구계의 분위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 볼 만한 영화이다. 펠레 본인이 직접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것도 포르투갈어가 아닌 영어로 했다.
- 축구 잡지 스포르트 바이블에서 2020년 9월25일 만일 펠레가 현역 시절 발롱도르의 평가 대상에 들었다면 산투스 FC 시절 7개의 발롱도르를 탔을 것이라 예상했다.
- 코로나로 시상이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정되었다. 스트라이커 대신 미드필더 포지션에 이름이 올랐다는 점이 논란이 되긴 했으나, 선정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로타어 마테우스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올타임 드림팀 선정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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