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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주가 쓴 아빠 서세원

by 두용이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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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주가 쓴 아빠 서세원

*같은 유전자

Danielle Suh

​나는 아빠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린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렸을때는 셜록 홈즈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고, 조금 커서는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마츠모토 세이쵸와 같은 작가들의 소설들을 찾았다.
내가 산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빠를 주고, 아빠도 늘 다 읽은 소설들을 나에게 주었다.
아빠는 늘 새벽 두 세시가 훌쩍 지난 뒤에야 귀가를 하였는데, 그 때까지 깨어 있는 사람은 가족들 중 나 하나였다.
그래서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내 방문을 두드려, “자냐?” 하고 물은 뒤, 내가 안자고 있으면 거실로 나오라고 해서 같이 책을 읽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었다.

​우린 영화 감상을 좋아했다.
가끔 책 읽는 일이 지루해질때면 아빠와 영화 또는 미드를 밤새도록 릴레이로 보곤 했다. “24"이라던가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미드를 보며 같이 긴장하고, 추리하고, 누가 범인을 맞추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진라면이나 짜파게티를 끓여먹기도 하고, 계란을 네 다섯개씩 반숙으로 삶아 먹기도 했다.
뜨거워서 김이 나는 삶은 계란을 후후 불어가며 소금 후추에 살짝 찍어 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야식이 또 없었다.
여름엔 포도를 주로 먹었는데, 매일 밤 각각 한송이씩 뚝딱 먹어버리는 바람에 아빠는 늘 근처 마트에서 그 비싼 포도를 두 박스씩 사오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아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적어도 그 순간들만큼은 아빠를 참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아빠와 나 사이에 부녀지간을 넘은 의리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었다.
가족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때면 시한 폭탄같은 아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빠에겐 “엄마가 원래 그렇지, 아빠가 이해해”라고 말한 뒤, 엄마에겐 “아빠가 이러는거 하루 이틀이야? 엄마가 이해해”라고 설득하며 둘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양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아빠가 동생을 혼낼 때도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희한하게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내가 나서면 그나마 진정이 되는게 아빠였다. 어쩌면 나는,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지고, 동생과 부모님과의 관계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긍정적인 감정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추리 소설도 더 이상 읽기 싫었다.
영화를 보는 일도 싫어졌다. 더이상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취미를 통해 아빠가 생각나는 것은 더욱 싫었다.

​어차피 아빠에겐 이미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새로운 자식도 생겨 나와 동생은 신경쓰지도 않을테니 나도 그러고 싶었다. 신경쓰기 싫었다.
그렇지만 같은 유전자 탓인지 뭔지, 나는 취미 이외에도 아빠와 닮은 점이 많고, 그래서 지금도 가끔은, 아니 자주, 아빠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작년부터 레코드판을 모으고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취미가 생겼는데, 이것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아빠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빠는 레코드판이 수백장이나 있었고 턴테이블도 여러개 있었다.
아빠는 20대 초반에 다방에서 디제이 일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레코드판을 모았다고 했다.
깔끔하기로 유명한 엄마는 애물단지라고 싫어했지만, 나는 서재방에 앉아 아빠의 레코드판들을 하나씩 꺼내어 영어로 된 미국 가수들의 이름을 읽어보고, 오래된 레코드판의 냄새를 맡아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갖기 싫어 무던히 노력했는데, 나는 결국 턴테이블도 사고 레코트판도 꽤 많이 모아버렸다.
아메바라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레코드점에서 산 것들도 있고, 아마존으로 오더한 것들도 있고, 하다 못해 9가와 마켓 스트리트 코너에 있는 노숙자 아저씨에게 5달러씩 주고 싸게 구입한 것들도 있다.
오래된 레코드판으로 노래를 들으면 시간은 왜인지 모르게 느려지고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아빠가 덜 미워진다.
이제 아빠도 나를 덜 미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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