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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팀 선수 프로필

루드 굴리트 프로필

by 두용이 2022.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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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 굴리트 프로필 

이름
뤼트 휠릿
Ruud Gullit
본명
뤼디 딜 휠릿
Rudi Dil Gullit
출생
1962년 9월 1일 (59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  수리남
신체
 191cm / 체중 99kg
직업
축구선수 (유틸리티 플레이어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ASV 메이르보이스 (1967~1975 / 유스)
AFC DWS (1975~1978 / 유스)
HFC 하를럼 II (1978~1979)
HFC 하를럼 (1979~198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1985)
PSV 에인트호번 (1985~1987)
AC 밀란 (1987~1994)
 UC 삼프도리아 (1993~1994 / 임대)
UC 삼프도리아 (1994~1995)
첼시 FC (1995~1998)
감독
첼시 FC (1996~1998 / 선수 겸 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199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4~2005)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07~2008)
FC 테렉 그로즈니 (2011)
네덜란드 대표팀 (2017~2018 / 수석 코치)
국가대표
 66경기 17골 (네덜란드 / 1981~1994)

 

별명
검은 튤립, 굴멘
주발
오른발(양발)
등번호
HFC 하를럼 - 13번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7번
PSV 에인트호번 - 10번
AC 밀란 - 10번
UC 삼프도리아 - 4번
첼시 FC - 4번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10번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네덜란드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과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1980년대~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수리남 출신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소속된 클럽마다 우승을 한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축구 게임

비록 전설임은 틀림없으나,

게임 내에서의 위상이 현실의 활약상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 되는 선수다.

당장 FIFA 온라인 시리즈에서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를 밟고 다니고 있으니

고평가 되고 있다는 말은 어찌보면 당연.

게임은 사실상 굴리트라는 선수가

현재에도 많이 알려진 유일한 이유로,

전성기가 짧고 한국인이

직접 보기 힘들었던 80년대 선수임에도

어지간한 현역 축구선수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고

현 세대까지 이름을 떨치게 한 요소이다.

 

2000년대에는 오렌지 삼총사 모두가

유일하게 위닝 일레븐에서 레전드 팀의 일원으로

등장해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위닝의 클래식 팀이 으레 그렇듯

라이선스 문제로 게임상에는 굴라스(Gullas)라고 나와 있었다.

일단 포지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전체 라인이 활동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보라돌이일 때 골치가 아파지지만,

네덜란드는 그 범용성에서 아르헨티나를 초월한다.

 

예를 들자면

1.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가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윙어로 넣는다.

2. 마르코 판바스턴이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스트라이커로 넣는다.

3. 에드가 다비즈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중앙 미드필더로 넣는다.

4. 로날드 쿠만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센터백에 넣는다.

 

전 영역에서 98이라는 아름다운 능력치를

자랑하는 굴리트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피파 14와 넥슨의 피파 온라인 3에서

희대의 사기 캐릭터로 출시되며

본격적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피파 온라인에서는

발매 후 1강이 35EP를 기록하는 등

정신나간 밸런스 브레이커로 명성을 떨치는 중.

이후 조각 이벤트 등이 겹쳐 10EP대까지 떨어졌다가

입소문을 타며 계속해서 시세가 올라 +1160억까지 상승하였다.

한동안 피파 온라인 3 가격 최강자 5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

역시 알베스, 즐라탄, 야야 투레를 합친듯한 미친 성능은 덤.

피파 온라인 3에서는 레벨 20을 찍으면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가는

정신나간 스텟을 자랑했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11명을 동일한 선수를 넣는다면

어떤 선수를 쓸 것인가 하는 떡밥에서

백이면 백 추천하는 선수.

그만큼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

심지어 0카를 갖다 써도 어지간한 선수 1카 이상의 효과를

보이는 미친 존재감을 보인다.

전술적인 요인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아마추어~프로페셔널 단계의 순위경기에서는

피시방 선수로 굴리트가 나오면

이거 하나로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얼티밋 레전드 카드가 출시된 이후에는

호나우두에 밀려 가격 2순위가 되었다.

 

2021년 현재는 피파 시리즈,

피파 온라인 4와 위닝일레븐에서 등장한다.

위닝일레븐의 경우 PES 2018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피파 온라인 4에서는 NHD, TT, TC, HOT,

LH, MC, EBS, CA, CAP, BTB, FA

11개의 시즌이 존재한다.

전작에서는 보급형 굴리트가

거의 끝물에서야 나왔고 그마저도 상당히 비싸

굴리트 자체가 그렇게 많이 보이진 않았다.

사기긴 해도 사용유저 자체가 매우 적었던 상황.

그러나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시작부터

시즌이 있고 꾸준히 타 시즌이 추가되며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유저가 사용하는

절대적인 적폐 선수로 꼽히고 있으며,

이는 상기 언급되는 전작과는 달리

피파 온라인 4 시작부터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순위 경기를 비롯해 모든 경기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상대팀 스쿼드에 포함되어있고

고랭크로 갈수록 스쿼드는 적폐화돼서 더욱 심해진다.

양발인데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모든 포지션에 가용되는 스텟을 바탕으로

엄청난 성능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체 능력과 발기술의 언밸런스가

굴리트를 적폐로 만드는 것이다.

보통 굴리트 정도의 피지컬을 가진 선수들은

게임 내에서 조작감이 굉장히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굴리트는 하드웨어에 걸맞니 않은

괴랄한 스피드와 마름체형이지만

몸무게와 몸싸움 수치를 이용한 경합 능력,

중거리 슈팅과 감아차기가 모두 가능한

슈팅 능력까지 모두 겸비한

그야말로 유일신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선수이다.

그 어떤 선수도 굴리트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이 때문에 굴리트 온라인 4라고 불린다.

피파온라인 4의 적폐 3대장 호굴비 중의 한 명이자

피온 4에서 가장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모두가 가장 증오하는 아이러니한 선수.

특유의 대걸레같은 머리스타일만

봐도 욕이 나온다는 유저도 많다.

 

 

심지어 신규출시한 EBS클래스 같은 경우엔

상체 미페에 EBS클래스중 제일 높은 105로 출시 된지라

1카의 가격이 무려 230억이고,

5카의 가격은 무려 1,000억이다!

사실 MC 굴리트 출시 이후에

신규 시즌이 출시되지 않았고,

mc굴리트 특유의 굴리트답지않은 약한 몸싸움 덕에

굴리트의 존재감이 약간은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EbsCap시즌의 출시로 투자를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끝판왕의 성능을 보여주는 선수가 되어

다시 굴리트온라인으로 만들었다.

 

https://youtu.be/UCeqtowCxFo

 

2022 여름에는 ICON 클래스 굴리트의 출시를 예고하며

본인이 직접 출현한 광고도 찍었다.

그 굴리트가 아이콘으로 출시되는만큼

섭종카드의 스텟과 성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굴리트는 굉장한 레전드로 논해지는 선수임은 틀림없으나,

이토록 대단하게 등장하여 동시대 라이벌인 마테우스,

그 시대 최고의 선수였던 마라도나는 물론

그 어떤 전설조차 가볍게 무시하는 성능으로

피파 온라인 4의 영원한 고질병으로 자리잡았다.

사실 순수 능력치 상으로는

펠레, 마라도나보다는 아래인 1.5등급 선수로서

어느정도 현실반영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 펠레 또는 마라도나가 100의 능력치를 받았다면,

굴리트는 동률 내지 1~2정도 낮은 능력치를 부여받는다.)

부여받은 능력치와는 다르게 키 185cm 이하의 선수는

취급도 하지 않는 게임 엔진 특성상

본의 아니게 사기적인 선수로 올라간 영향이 크다.

즉 능력치 및 현실 활약상이 높아도 키가 165cm

불세출의 영웅 마라도나는 찬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논해질 레벨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에도

양발에 키가 190이 넘어가며 능력치까지 고른 굴리트는

모든 팀 빌딩에서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선수'로 논해진다.

 

피파에서 사기캐릭으로 자리잡은 굴리트지만

위닝에서는 더 이상 사기 캐릭터가 아니며

그냥 괜찮은, A-급 정도의 레전드중 한 명이 되었다.

 

모바일 PES 커뮤니티에서는 평가가 좀 미묘한데,

다름아닌 클래식 No.10이라는 플레이스타일 때문.

활동량은 꽤 많으나 산소탱크(박투박)마냥

필드 전체를 뛰어다니며 피지컬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도 아니고

침투도 제때 하지 못하면서 2선에서 패스나 콕콕 찔러줘야 하는

감질나는 플레이스타일인데,

이로 인해 역습 상황에서 뒤로 빠지며

템포를 잡아먹는 등 여러가지 역효과를 내기 일쑤다.

참고로 모바일 PES의 공격형 미드필더나

섀도우 스트라이커 포지션의 레전드들은

이 특성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많고,

하나같이 평가가 다 안좋다.

심지어 메날두조차 씹어먹을 수준의 사기 스탯을 보유한

마라도나와 호나우지뉴조차 이 플레이스타일 하나 때문에

컨트롤을 즐기고 엄청나게 잘하는 유저가 아니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그래도 저 둘과 달리 굴리트는 피지컬과 범용성만큼은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아이코닉 버전은 쓸만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며

톱으로 활용할 경우 클래식 No.10 특성이 발동되지 않아

연계형 공격수로서 상당한 성능을 보여준다.

다만 결정력이 애매해서 철저하게 연계 위주로 사용되며

피온 굴리트급의 사기성은 비에이라와 루메니게가 나눠서 가져갔다.

사실 톱 굴리트도 결정력이 낮지만

원터치 패스와 스루 패스 스킬을 장착했고,

워낙 몸빵이 좋아서 헤더와 볼 공급으로

루메니게를 보좌하기에 최적화된 톱이란 이유로

쓰이는거라 위닝에서 굴리트의 위상은 상당히 낮다고 봐야한다.

그마저도 유저 취향에 따라서

토레스나 오언, 음바페, 호날두, 메시에게 자리를 뺏기기도 한다.

 

피파 모바일에서도 현재 기준 오버롤 118 선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버롤이 110인 굴리트가 많은 유저들에게 쓰이고 있다.

 

https://maybethere.tistory.com/3895

 

(피파모바일) 118 굴리트 등장 (ICON SUPER STAR 22 클래스)

(피파모바일) 118 굴리트 등장 (ICON SUPER STAR 22 클래스) 패치 이전 최고 오버롤이 116이었던 점에서 오버롤 118의 등장도 놀라웠고, 118 오버롤의 여러 포지션인 굴리트도 신기했다. 현재 이적시

maybethere.tistory.com

 

온라인의 원작인 FIFA 콘솔에서도 프라임(전성기) Icon 굴리트는

토티/토츠 메날두를 넘는 가격을 자랑한다!

전체적으로 피파 시리즈에서는 사기캐로 군림하지만,

위닝에서는 그정도는 아닌 수준.

그러나 한국에서는 피파 온라인이 강세기 때문에

굴리트=사기캐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있다.

 

배성재의 언급에 따르면

본인도 자신이 축구 게임 내에서

사기적인 스탯을 갖고 있는걸 알고 있으며

무척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이미 본가 EA판 피파를 즐기는 스트리머 및

게이머들이 각종 세미나 등에서 굴리트를 보기만 하면

수시로 본인의 사기성에 대해 언급하여

굴리트 본인도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고 한다.

 

클럽 경력

굴리트는 하를럼 소속으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에레디비시 최연소 데뷔 기록을 다시 썼으며

팀은 강등당했으나 굴리트의 활약으로 다시 승격한다.

1981-82 시즌에는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UEFA컵 티켓을 따낸다.

이는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출전이다.

이때의 활약으로 굴리트는

'네덜란드의 던컨 에드워즈'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면서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과 KNVB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기도 해서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상도 받았다.

 

 

이후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987-88 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특히 판바스턴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하여

아리고 사키의 압박 축구를 토대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판바스턴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989-90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

굴리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하락했다.

 

 

다음시즌인 1990-91 시즌부터 적용된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사키이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전술에

변수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밀란이 패배한다.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UEFA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난다.

하지만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92 시즌에 리그 무패 우승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

1992-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는데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의 밑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

첼시에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한 후 은퇴했다.

 

국가대표 경력

굴리트의 국대 경력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의 축구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 밀란의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 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

굴리트는 가장 전술 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골키퍼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 이상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굴리트로 시작해서 굴리트로 끝났다.

 

 

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유로 1988이었고,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끄는 독일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에서 네덜란드는

조별예선에서[9]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

또한 굴리트는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였다.

네덜란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했다.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판바스턴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굴리트는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지도자 경력

첼시에서 몸담고 있던 1995-96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부임하자

당시 첼시의 선수였던 굴리트는

선수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6-97 시즌 그의 지휘력과 경기력은

첼시의 27년 만의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1998212일 리그 2위와

위너스컵-리그컵 8강에 올라와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주 켄 베이츠와의 불화 끝에 경질당했다.

너무 많은 자금을 사용해 팀을 재정난에 빠뜨렸다는 이유.

여담으로 제이미 캐러거가 1997105일에

자신의 커리어 첫 첼시전을 가졌는데

이때 첼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자

감독 겸 선수였던 굴리트가 워밍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켓만 벗고 경기에 들어와서 뛰었다.

캐러거는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고 있었는데

굴리트가 정말 굉장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1998-99 시즌을 앞두고

때마침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경질하고

새 사령탑을 물색중이던 뉴캐슬에서 모셔갔지만,

부진한 성적에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며 급격히 입지를 잃어버렸다.

특히 오랫동안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한

팀의 주장 롭 리의 등번호 7번을 빼앗고

유스 팀으로 강등시켜 팬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첫 시즌 리그 13위를 기록한 굴리트는 급기야

1999-2000 시즌 5라운드 승격팀이었던

선덜랜드와의 위어타인 더비에서

팀의 주포 앨런 시어러를 벤치에 앉히고

기용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사흘 후 굴리트는 경질되고 만다.

이후 바비 롭슨 감독이 위기에 빠진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짓밟고

시어러는 5골을 폭발시켜 굴리트를 머쓱하게 했다.

시어러가 그의 다큐멘터리에 말하길

그때 굴리트가 팀 기강을 잡기 위해 시어러를 이용했고

그때 시어러가 못했다면 시어러가 이적했을것이라고 회상했다.

 

 

200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이 되지만

리그 4위에 그쳐 경질되고 만다.

여담으로 이 당시 송종국을 기용하지 않았다.

피파온라인으로 재평가받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는 평가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예스맨이라고 기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예스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굴리트와 송종국의 관계를 보면 굴리트는

처음에는 송종국을 주전으로 기용하긴 했지만

자주 송종국의 팀 융합, 전술능력 등을 탐탁지 않아 했으며

월드컵 때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까지는 기대하고 있다,

네덜란드어 학원에도 다니고 있다며

의사소통 실력이 늘어나길 기대했지만

끝내는 2년이 지났는데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언어문제에 대해 해결해야 한다며 구단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말하고 벤치에 앉혔다.

송종국 본인도 굴리트와의 축구는

자기와는 잘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감독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굴리트 입장에서 보면 공격수도 아닌 수비수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만 하면 네, 네 하면서

전술을 계속 틀리니 참다가도 답답했을 것이다.

 

 

2006년 데이비드 베컴과 홍명보의 소속팀으로 유명했던

LA 갤럭시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역시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08,

알렉스 랄라스 단장과 함께 짤렸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라이벌 디에고 마라도나와 매우 유사하다.

같은 오렌지 삼총사였던 마르코 판바스턴과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무난하게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는 감독 활동을 접었으며 FIFA가 주최하는 공식 행사를 뛰며

사회를 자주 보는 중이다,

이 외에도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손흥민이 푸스카스상을 수상할 때 사회자가 루드 굴리트였다.

 

뭉쳐야 찬다 2에 출연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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