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관하여 :: 외시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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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관하여

by 두용이 202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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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에 갇혀버린 행복

행복하기 위해서 꼭 갖추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 그리고 굳이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다지 서운해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들엔 어떤 것이 있겠는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대 철학자인 에피쿠로스(Epikuros, B.C. 314-270)는 행복에 필요한 것들을 3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한 것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우정
자유
(불안을 만드는 주요한
근원인 죽음, 질병, 빈곤,
미신에 대한) 사색
음식, 오두막,
좋은 집
개인용 목욕 시설
연회
하인
생선, 육류
명성
권력

< 2 : 행복에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행복은 몇몇 복잡한 심리적 재산에 크게 좌우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결과물과는 상대적으로 관계가 적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실제로 '고통'에 처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행복하다. 그는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현시대에 사람들은 그다지 필요치 않은 것들을 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값비싼 물건(명품)을 산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지도 못하지만 강력히 끌리게 됨을 볼 수 있다. 이 행위는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의견들'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광고는 그러한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그토록 쉽게 암시에 걸려드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마 광고가 그처럼 널리 유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에 걸려 넘어지면서 우리는 행복에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행복의 모양새가 원래부터 이러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행복에 대해 제시하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숙고되고 있었던 행복이라는 주제에 좀 더 다가서서 살펴보도록 하자.

 

행복을 위한 출발점들

행복에 관해 다시한번 상기시켜야 할 '기준'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자신의 불행을 원하지 않고, 행복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보편적으로 추구되는 가치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행복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추구하고 욕구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인간이 가지는 현세적인 욕구나 가치도 인정한다. 그리고 모든 욕망이나 욕구도 인정하고 그러한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욕구들에 대해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행복이란 우리의 모든 욕망들에게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우리의 욕망은 맹목과 무질서 속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행복에 관해 우리가 생각해 볼 다음 문제는 행복이 단순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이 우리가 도달하는 어떤 것,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어떤 고정된 목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정적인 것이 아니고 활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행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활동을 '동반하는' 어떤 것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의 행위를 통해 행복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원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인간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의 행위에 공통된 부분이 있음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은 '우리 행동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 목적에는 중간적 목적과 궁극적 목적이 있고, 중간적 목적에는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선택해서 행동해야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만민에게 공통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삶 속에서 펼쳐지는 행복

현대인들이 느꼈던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는 행복, 그리고 육체적인 것에 대한 부분은 피상적이고 단기적인 만족만을 주기 때문에 고대 이래 행복의 중심무게를 인간이 스스로 산출한 것으로 옮겨 놓았다. 아직 통제되지 않는 충동과 욕구가 이에 상응하는 교육을 통하여 변화되었다고 전제한다면, 행복은 탁월함과 덕에 따르는 생활양식에서 목격할 수 있으며 이성에 적합한 삶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기본적인 조건(, , )은 채워져야 한다. 이 조건을 채우기 위한 삶의 활동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경제적 풍요 아래에서도 여전히 물질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근사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근사 메커니즘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행복의 한계와도 연관이 있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구호는 경제적인 필요조건이 기본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 난 다음부터 단계적으로 그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의 국민들은 과거 50년 전보다 두 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조사는 그들의 행복이 별로 증대되지 않았거나 심지어 감소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기본적인 삶을 위해 계속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이 일(노동)도 문제가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 자신의 힘(정력)을 쓴다는 것을 말하고, 이러한 힘(정력)은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필요한 힘이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자신의 가족과의 관계를 돌볼 시간과 정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아쉽게도 직장에서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직장은 공동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익 사회적인 것으로써 존재한다. 더욱이 노동자들은 이를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노동 방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선택이 어디에 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나아지는 세상 속에서 그만큼 더 바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과거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3-4시간의 노동만으로도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으며, 신석기 시대에는 7-8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노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과는 성격이 다른 노동이라고 한다. 이들의 노동은 노동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으며, 그런 까닭에 서두르는 법이 결코 없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노동은 더욱 가혹한 것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기술의 발달과 비례하여 작업의 강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지적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임금노동이라는 자본주의적 노동 구조가 노동을 강제 노동으로 만들며, 이런 까닭에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alienation)되고, 자신을 잃게 되며, 오직 노동이 끝난 다음에야 자신에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그는 비판하였다.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소외가 다른 인간들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그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의 공간이 공장에서 사무 공간으로 옮겨져도 여전히 노동의 가혹함은 계속된다. 인간이 가지는 피로감은 육체에서 두뇌로 더욱 더 빠르게 늘어만 갔다. 노동에서의 정신적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었다.

 

앞서 논의한 대로 경제적 풍요가 가져다 주는 행복은 한계가 있다. 일하는 인간을 위한 행복은 무엇이 있을까? 일을 놀이처럼 만들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일에 집중하여 일의 도전에 적절한 기술로서 응전하고 다시 피드백을 받아 새로운 도전에 재응전하는 방식의 작업을 통하여 일을 놀이로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 자신에게 적합한 일거리 그에 따르는 노력은 불가피하다. 이로 말미암아 일은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숙명이 아니라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일거리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일에서 최고의 효율을 올리는 사람(달인)은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며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다루는 부분은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분명 힘(정력)이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은 이 부분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동시에 휴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행복이 되고 있음도 인정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주어지는 여가를 사람들과의 관계에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여가를 보내고 있는가?

 

현대에 이르러 여가 활동에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우리는 화면을 보는 것(TV 화면, 휴대폰 화면, 컴퓨터 화면 등)에 보내고 있다. 이러한 미디어는 초창기 라디오로부터 컴퓨터라는 도구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도구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분명 그것들은 인간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도구들이 보여지는 모습은 오히려 단절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통은 운동처럼 자신의 신체와도 소통하지 않으며, 담소처럼 직접적으로 다른 인간과의 소통하지 않으며, 기도처럼 절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미디어와의 거리두기'이다. 자신의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주위를 보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행복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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