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프로필 (뇌동맥류 건강이상) :: 외시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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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프로필 (뇌동맥류 건강이상)

by 두용이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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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프로필 (뇌동맥류 건강이상)

출생
1953년 6월 15일 (6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핑시
(現 베이징시)
재임기간
제9대 부주석
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중국공산당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중국공산당 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제7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2013년 3월 14일 ~ 현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20133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

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 통수권자)

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역대 중국 최고지도자들 중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다.

 

20183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중국 헌법에 명시된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하여

종신집권의 야욕을 드러냈으며

2021년 중국공산당 제196차 전체회의를 통해

사실상 시진핑의 종신집권이 가능해졌다.

 

생애

 

1953615,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 1903.10.4 - 1936.4.14)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다.

이후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가

국민당군이 철저히 준비하여 추진한

5차 초공작전으로 삽시간에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으로 피신해 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 고위직에 진입한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2녀를 낳았다.

1943년 이혼 후 1944년 치신(齐心, 제심)과 재혼했다.

중쉰은 치신과 2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이다.

, 3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인 셈.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파로 몰려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시 16살이었던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데다,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习和平)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

입당 신청을 했으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 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리더십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 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 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약력을 보면 <19791982년 국무원 판공청,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현역)>으로 나오는데

갓 화공학부를 졸업한 대학생이

한국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 비서진으로 3년간 활동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최고 지도자는 군사적 능력을 중요히 여기는 중국에서,

혁명 원로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새파랗게 젊은 대학 졸업생부터 군부에 인맥을 형성했다.

이후에도 당부에서 일하며 총서기에 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군부에 끈이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전 총서기 후진타오가 군부에 끈이 없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상당히 늦게 인계받은 것에 비해 (후진타오의 뜻도 있었지만)

바로 받은 시진핑은 처음부터

최고 지도자로서 군권 쪽은 훨씬 영향력이 크고,

중국 입장에서 군부 개혁에 내부적으로는

다른 대안이 없다 본다고 한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베이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1998년부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도 역임해 왔으며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상하이시를,

2018년부터는 내몽골 자치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다.

같은 해 10월 제17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하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집권

시진핑의 집권은 이전 주석들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미묘한 권력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날 상하이방의 장쩌민이 공청단의 후진타오에게

정권을 양도한 것은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생전에 장쩌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되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계자로 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수인계 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쩌민은 정권 자체는 후진타오에게 인계해 주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은 대부분

상하이방으로 채우는 꼼수를 썼고 결국,

후진타오를 반쪽 짜리 주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했다.

4세대 지도부가 출범할 때 지도부 9명 중

6명이 전부 상하이방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2006년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밀던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가

비리 문제로 낙마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말하자면 후진타오의 공청단이 일격을 가한 것이다.

천량위의 비리 수준은 장쩌민조차도

실드를 쳐주지 못할 정도였기에

그로서도 이 숙청을 막기는 불가항력이었다.

후진타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해 2007년에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기회를 놓칠 새라 자기가 후계자로 밀던

공청단의 리커창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리커창을 주석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쩌민과 상하이방으로서는

리커창의 집권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

결국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이 대안으로 올라오고,

리커창은 주석이 되지 못하고 총리로 만족해야 했다.

 

시진핑의 빠른 부상엔 후진타오의 협조도 한몫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주석직에는 2003년에 올랐으나,

장쩌민이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 동안 반쪽 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314일부터

다른 일이 없는 한 20183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3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관리형 주석으로 보였던 시진핑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며 10년 임기는 물론이고

종신임기까지 바라보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여담

  • 삼국지에 등장하는 습정의 후손이다. 정확하게는 습정의 후손인 동진의 역사가 습착치의 후손이라고 한다.
  • 축빠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는 메시의 유니폼까지 선물 받고 좋아할 정도다. 2011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던 손학규와 만남 당시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고, 월드컵을 유치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내 3가지 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인지 중국의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서 체육 과목 구기 테스트 종목에 축구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AC 밀란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잇따른 삽질로 현재는 중국 국가 대표팀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중국 슈퍼 리그를 무지막지하게 키우자는 걸로 방향 전환을 했다고 한다. 축구굴기라 해서 중국 축구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전국에 축구 전문 학교 2만 개 설립을 하고 있는데, 2만 개면 대한민국 전국에 있는 학교 수보다 많다. 시진핑의 음성을 변조해 시진핑의 축구 사랑과 독재를 한데 엮어 패러디한 인간관악기 영상도 있다. 간체자로 되어있고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정치사정에 해박한 걸 봐선 시진핑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해외거주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 젊은 시절 복싱을 배웠었다고 하며, 자세를 취한 적도 있다. # 이와 별개로 기사가 쓰였던 2014년 당시에는 국내에서 시진핑의 인상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그런 지 시진핑을 좋게 보는 댓글들이 꽤 된다.
  • 바둑을 즐긴다고 하며, 이창호의 팬이기도 하다. 2014년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서 이창호의 얼굴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악수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국가 간 선물 교환 시에도 한국에선 바둑알을 선물했다.
  • 2014년 7월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서울대에 책 기증 의사를 밝혔고, 약 1년 후 서울대 도서관에 책, 정기 간행물, 영상물 약 1만 점을 기증하여 약속을 지켰다. 
  • 글로벌공학교육센터(38동)에는 시진핑의 방문 강연을 기념하여 대강당(520호)을 '시진핑홀'로 명명했다.
  • 베이징(北京, 북경)이 베이핑(北平, 북평)이던 시절 베이핑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이 近平(근평)이다. 동생은 가족들이 베이징과 멀리 있을 때 태어나 이름이 위엔핑(遠平, 원평).
  • 인도의 한 뉴스 앵커가 Xi Jinping의 Xi를 로마 숫자 11로 착각해 Eleven Jinping으로 읽었다가 해고된 적이 있다.[30]
  •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나폴레옹이 중국한테 했던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잠에서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이 사자는 평화적이고 친절한 문명 사자다."라고 말했었다. 
  • 중국산 스마트폰을 애용한다.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ZTE Axon 시리즈 스마트폰 중 하나인 ZTE Axon 이라고 한다. 김정은이 Apple에서 만든 MacBook을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시진핑 집권 이후의 중국에는 유독 호랑이를 때려잡는 시진핑 그림이 많다. 해당 그림에 나오는 호랑이들은 부패한 고위 관료들을 빗댄 것이다.
  • 중국 대학생 네티즌들이 뽑은 카리스마형 훈남이라고 한다. 참고로 미국 순위 선정 매체 ‘하티스트 헤즈 오브 스테이트’(Hottest Heads of State)에서는 196위를 했다. 즉, 전 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외모가 최하위권. 참고로 꼴찌는 북한의 김씨.
  •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더불어 매우 칭찬했다. 서방이나 국내 언론에서 시진핑의 부패 척결이 권력 강화의 수단이기만 하다는 일각의 견해를 부정하고, 시중쉰이 어린 나이에 큰 공산주의 조직을 세웠던 것이나 천안문 사태 때 후야오방을 지지했던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장기집권 의도를 드러내면서 독재와 우상화를 본격화하고 나선 2018년 시점에는 방송에서 스스로 자신이 "똥이 됐다." 하고 탄식하며 비판파로 돌아섰다.
  • 대기원시보에서는 시진핑을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중국의 민주화를 이룩해낼 중화 민족의 메시아로 보고 있는 듯하다.
  • 청년들에게 "밤을 새면 건강에 나쁘다." 라고 조언하며, 자신은 아무리 늦어도 밤 12시 이후에는 취침한다고 하였다. 네이버 뉴스
  • 전원책 변호사에 따르면 시진핑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말을 최대한 아낀다고 한다. 아마 과거에 있었던 아버지 시중쉰이 숙청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경험해서 말 한 마디가 나중에 발목 잡힐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2014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애시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시진핑의 지지율은 내치(內治) 94.8% 외치(外治) 93.8%라고 조사되었다고 한다.
  • 사드 배치 논란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호감도가 의외로 높았던 인물이다. 2013년에는 호감 40% 비호감 20%로 호감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당시에는 호감도가 55.1%로 오르기까지 했다. 사드 논란 이후에는 혐오 대상이 되어 호감도가 20%대로 떨어졌지만 트럼프, 푸틴, 아베 등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호감도가 괜찮았다. 하지만 당선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던 트럼프는 방한 이후 한국에서 트럼프의 호감도가 괜찮아졌고 시진핑이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호감도가 또 내려가는 중이다. 결국 트럼프에게 역전당했다. 지금은 아예 혐중감정으로 인해 트럼프가 상당한 지지를 얻게 된 상황이다.
  • 중국의 한 초등학생이 "시진핑 할아버지 살 빼세요."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도로 뺐으면 좋겠다던 이 편지를 보도한 기사들은 돌연 인터넷에서 삭제됐다고 전해진다.
  • 머리숱이 엄청나다. 아버지 시중쉰도 머리숱이 엄청난데 유전인듯 하다. 그동안 흰머리를 감추다가 공식석상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 시진핑 국가주석의 승인을 받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시진핑(習近平)식 ‘스마트 교도소’: 비밀 문서 공개되다
  • 펑리위안은 도민준을 언급하며 젊은 시절 시진핑이 김수현과 닮았다고 주장 한 바 있다.
  • 시진핑의 작은 신(新)홍위병.
  • 미얀마를 방문하는 글 시진핑의 페이스북 자동번역 결과 '똥구덩이'로 번역되는 소동이 있었다.
  • 중화민국에 대해 엄청난 강경책을 펼치는 시진핑이지만 웃기게도 중화민국의 군통령이자 중화권 최고의 여가수였던 등려군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면 등려군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의 필름이 다 늘어질 정도로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등려군이 살아있었다면 시진핑의 초청으로 중국에 방문하지 않았을까 라고 한다.
  • 2017년 8월 1일 "한국 전쟁 중국이 승리했다"라고 발언하였다.
  • 중국 인민해방군이 2020년 2월 28일 갑자기 대량의 방탄복 140만 개를 주문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만을 상정한 침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 대만등 중국 본토를 제외한 중화권에서 인간 관악기 소재로 애용되고 있는 중이다. 그 예시로 중화권 유튜버 乳透社·小反旗등이 있다. 위에 있는 축구발언 영상의 제작자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짤이 있다. 자금성에 초빙한 도널드 트럼프와 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2017년 11월이라 날씨가 꽤 쌀쌀했다. 이때 시진핑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트럼프와 눈이 마주치자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굳어진 얼굴로 뻘쭘한 것처럼 보였다. 이게 개그 아닌 개그로 움짤을 남기기도 했다.[34] 그런데 당시 촬영된 영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시진핑은 트럼프와 대화하면서 계속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한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두 명 모두 대화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 와중 자금성을 둘러보던 트럼프가 시진핑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우연히 시진핑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게 촬영되어 앞뒤 자르고 그 부분만 와전되어 퍼진 듯하다. 또한 시진핑 특유의 굳어진 표정은 외국 정상이나 대사를 만날 때 으레 하는 표정으로 꽤 유명하다.
  • 의외로 불교와 인연이 있다. 80년대 징딩현 당부서기 시절 당시, 국공내전으로 폐사가 되어버린 당나라 시대 사찰 임제사(臨濟寺)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 # 모친 치신은 아예 티베트 불교 신자라는 루머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무신론에 따라 종교인은 중국공산당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시진핑은 무종교인이고 우상화를 위해 티베트인들을 탄압하고 불교유적들을 부수고 있다.
  • 2019년 11월 내지는 12월부터 펑리위안과 딸 시밍쩌랑 별거에 들어 갔다는 소문이 있다.
  • 영어는 그럭저럭 알아 듣는 편이지만 말하기는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전 주석 중 한 명인 장쩌민은 영어실력이 좋은 편이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영어로 연설하기도 했다.
  • 중국의 역대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다.
  • 성남시 분당구에 시진핑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시진핑 건강이상

뉴욕증시에 따르면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시진핑 주석이 '뇌동맥류'를 진단 받았지만

수술 중 위험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치료 받기를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뇌동맥류란 손상을 입은 뇌동맥이 부풀어 오르는 질환이다.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뇌출혈로 이어져 사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진핑 주석은 수술을 받기 보다는

중국 전통 민간 요법을 통한 치료를 선호했다고 뉴스위크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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