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주 프로필 (불나방 NEW 감독) :: 외시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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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주 프로필 (불나방 NEW 감독)

by 두용이 2022.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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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주 프로필 

이름
하석주
河錫舟| Ha Seok-Ju
출생
1968년 2월 20일 (54세)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양군
국적
대한민국 
신체
키 173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왼쪽 측면 모든 포지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부산 대우 로얄즈 (1990 ~ 1997)
세레소 오사카 (1998)
비셀 고베 (1998 ~ 2000)
포항 스틸러스 (2001 ~ 2003)
지도자
포항 스틸러스 (2003 ~ 2004 / 코치)
경남 FC (2005 ~ 2007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8 ~ 2010 / 코치)
아주대학교 (2011 ~ 2012)
전남 드래곤즈 (2012 ~ 2014)
아주대학교 (2015~)
국가대표
5경기 / 1골 (대한민국 U-23 / 1996)
95경기 / 23골 (대한민국 / 1991 ~ 2001)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현 축구 지도자.

별명은 왼발의 달인.

 

선수 시절

아주대학교를 졸업하고 1990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우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데뷔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며

43도움을 기록하며 활약.

비록 신인왕은 현대의 송주석에게 넘겨줬지만

1991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 씹어먹는 활약으로

34경기에서 75도움을 기록.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해 국가대표팀에도 처음 승선하여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1993~1994 시즌 동안에는 국가대표팀 차출 관계로

클럽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전국구급 유명세를 얻는다.

특히 1994 월드컵 1차예선 8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대중들에게 하석주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하석주 하면 왼쪽 윙백이 떠오르지만,

월드컵 예선전만 해도 본업은 투톱의 공격수였다.

데뷔한 대회인 대통령배 국제대회에서

MVP와 득점왕도 차지할 정도였으며

이땐 등번호도 9번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황선홍이나 최용수처럼

키 크고 떡대 좋은 대형 스트라이커를 선호했기에,

하석주의 포지션은 자연스럽게 왼쪽 측면으로 전환되고

간판 윙어인 고정운과 서정원이 모두 왼쪽을 소화할 수 있었기에

이들을 모두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연스레 윙백으로 내려갔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최종예선에서

강력한 공격력을 살려

이란, 북한을 상대로 각각 골을 넣었다.

 

그러나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에서는

2경기 교체출전에 만족해야 했다.

특히 볼리비아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후반 추가시간에 황선홍의 멋진 힐패스를 이어받아

1:1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하였으나,

키퍼 선방으로 골을 넣지 못하였다.

비록 황선홍에 비난이 집중되어 묻힌 감이 있으나

하석주도 만만찮게 개발이라는 욕을 먹었다.

그 때 비난과 부담감을 못 이겨 김호 감독에게

다음 경기인 독일전은 도저히 뛰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고,

결국 독일전은 결장했다.

 

그러나 그 때 찬스를 놓친 왼발 슛이 한이 되어서

왼발 킥을 매일 미친 듯이 연습했고,

그렇게 그는 왼발의 달인이 되었다.

이후 하석주의 기량은 만개하여

국가대표팀에서도 왼쪽 미드필더 자리를 꿰찼고,

K리그에서는 1996 시즌 두자릿수 득점(...)까지 기록한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선수단에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임생, 황선홍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당시 소속팀인 대우에서는 보내기 싫어서

기브스까지 하면서 선발을 물러주길 바랐으나

비쇼베츠가 지정병원에 보내서 재검사까지 시전하며(...)

끝끝내 올림픽에 데려갔다.

그정도로 큰 기대와 비중을 가지고 있었단 얘기.

 

1997년을 맞아 기량이 절정기에 달해

1997년에만 A매치 3-8도움을 기록했고

대통령배의 후신인 코리아컵에 출전하여

도움 4개로 대회 MVP가 되었으며

소속팀 대우 로얄즈의 3관왕, 즉 트레블을 이끌었다.

개인적으로도 20-20 클럽을 달성했으며

프리킥으로만 4골을 넣었을 정도로 리그에서도 맹활약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예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고

UAE전에서 특유의 공격가담으로 선제골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하석주는 차범근호 체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였고 월드컵 본선에서도 활약이 기대되었는데...

 

https://youtu.be/i5yiaQzqKLU

멕시코전 초간단 요약

https://youtu.be/1XwfYoQA7uo

 

리옹에서 열린 E조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인

멕시코전 전반 27,

하석주의 왼발 프리킥이 수비벽에 맞고 방향이 꺾이면서

절묘하게 반대편 골대로 들어갔다.

다시 말해서 운까지 따라준 득점.

이는 대한민국의 월드컵 출전 사상

최초로 넣은 선제골이었다.

당시 조 편성상 한국은 첫 경기 멕시코를

반드시 이겨야 16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이었다.

 

 

그러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전반전 30,

그러니까 골을 넣고 3분여 지났을 무렵에

상대의 라몬 라미레스 선수에게 백태클을 걸었다는 이유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이로써 가린샤 클럽 가입 확정.

결국 하석주의 퇴장 이후 한국은

급격한 체력 저하로 후반전에만 3연속 실점하며

1-3 역전패했다.

하나 넣고 석점이나 주다니!

라는 삼행시를 만든 바로 그 경기.

 

MBC보도 1분경 이 MBC뉴스 화면을 보면

확실히 고의적인,

그러나 당시까지는 많이들 하던 백 태클이었다.

하석주 자신도 퇴장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레드카드를 보고 어이없어하고,

옆에 있던 고종수도 판정에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국내에선 한국이 약소국이라서 판정에서

피해를 봤다는 흔한 레퍼토리가 반복되었다.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FIFA 회장 선거에서 제프 블라터의 반대파로서

렌나르트 요한손 당시 UEFA 회장을 지지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음모론도 나돌았고

여튼 이래저래 설들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차범근 당시 감독이

선제득점으로 고양된 선수들을

잘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석주도 나중에 인터뷰하기를 골을 넣고

너무 기쁘고 흥분돼서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서 파울을 하고

맘을 좀 다스리려고 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옐로카드까지는 각오했다고 했는데,

정작 심판이 빨간 카드를 꺼내자

처음엔 잘못 꺼낸 거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백태클이 중대한 반칙이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고,

설명도 잠깐 들었을 뿐이라

그걸로 퇴장까지 당할 줄은 몰랐다고(...)

석주 개인적으로도 축구를 시작한 이래

공식경기에서 퇴장당한 것은 이 경기가 유일한 경기였다.

 

이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하석주가 시범 사례로 걸리는 불운을 겪었으며,

그 반칙은 옐로카드 정도에서

끝나는 편이 나았다고 평한다.

당시 FIFA에서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비신사적인 백태클에 대한 제재에 중점을 두었고,

바로 퇴장까지 줄 수도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말은 뱉어놨지만 막상 1라운드가

절반이 지나도록 퇴장 사례가 하나도 없으니

엄포가 머쓱해질 수 있던 상황에서,

하석주가 그 엄격한 판정의 본보기로

퇴장당한 것이라는 것.

그 증거로 옐로카드 없이 바로 퇴장당한 경우에는

보통 2경기 출장정지인데 하석주는 고의성이 없었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다고 판단되어

1경기 출장 정지로 완화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석주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호 퇴장 선수로 기록되었고,

한국 축구 팬들은 이후 같은 대회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하석주보다

더 거친 백태클을 하고도

옐로카드나 구두경고 정도로 넘어가는 걸 보며

아쉬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대표적인 경기가 브라질과 네덜란드의 4강전 경기였는데,

호나우두가 전반전에 로날드 데 부어에게 백태클을,

연장 후반에는 프랑크 데 부어에게 백태클을 당했음에도

퇴장은 물론 경고도 없이 끝났다.

오죽했으면 후대의 사람들이 이 경기를 보고

호나우두가 저렇게 백태클이

난무한 시대에 뛰었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이후 하석주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오스트리아의 귄터 벤쾨 주심은

2년 뒤 UEFA 유로 2000의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4강전 연장전에서 고의라고 보기엔

애매한 포르투갈 수비수 아벨 사비에르의 핸들링을 보고

프랑스의 결승골이 된 페널티킥을 지시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처음 판정을 내렸을땐 논란이 크게 되었을 뿐이지,

명백하게 골대 안으로 향하는 공을 손으로 막았기에

변명이 여지가 없긴 했다.

, 원칙대로 판정하는 심판이었다는 얘기.

 

다행히 1경기 출장정지로 완화된 그는

파리에서 열린 벨기에전에 선발로 나섰고,

전매특허인 기가막힌 왼발 프리킥으로 유상철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약간의 명예를 회복했다.

왼발로만 11도움,

한국이 기록한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사실상의 팀의 에이스[12]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그걸 모두 덮을만한 한 번의 실수로

비난을 받아야 했던 불운의 선수.

2번의 월드컵에서 이래저래 욕만 먹었다(...)

하석주는 퇴장 이후 팀이 지고

차범근 감독까지 경질당하는 걸 보면서

프랑스 월드컵을 끝으로 국대 은퇴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벨기에전에서 1어시스트도 하고

팀이 투혼으로 벨기에를 탈락시키면서

어느정도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고.

 

이후로 2000AFC 아시안컵까지

계속 부동의 왼쪽 윙백으로 국대에서 맹활약했으며,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 자리는 이영표가 물려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석주도 히딩크 사단에서 제법 오래, 많은 경기를 뛰었다.

물론 하석주가 경쟁을 이겨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출장해

명예를 회복하길 바라는 팬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A매치 100경기 출장 기록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98월드컵 퇴장이 끝끝내

트라우마로 남아서 본인이 스스로 그만둘 때가 됐다고 생각해

추리클럽 가입을 얼마 안 남겨두고

국대은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퇴장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아직도 퇴장당하는 선수를 보면 자기일 같고

'나와 같은 상처를 입으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한다.

 

 

대우에서 쭉 뛰다가 J리그를 잠시 다녀온 후

포항 스틸러스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의 황혼을 장식하다가

2003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프로리그 수상은 1991년에 대우 로얄즈가

21경기 무패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했으며

1997년에는 소속팀 대우가 트레블을 달성했다.

J리그에서는 세레소 오사카와 비셀 고베에서 뛰었는데

세레소에서는 외국인 3명 출전쿼터에 걸려

당시 황선홍과 마니치 등에 밀려 많이 뛰지 못했고

비셀 고베로 이적하면서 팀의 중추로 펄펄 날았다.

당시 비셀 고베의 하석주-김도훈-최성용 한국인 3인방은

만년 하위권인 비셀 고베를 1부에 잔류시켰고

심지어 8위라는 호성적까지 찍었다.

당시 팀내에서는 최고참 하석주를 '오야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석주 본인 말로는

한국 국대가 3명이나 있는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면 망신이기도 하거니와

나중에 후배들의 진출길도 막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2000시즌을 끝으로 K리그로 복귀했는데,

사실 일본에서 1년 더 뛰고 싶었지만

가족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성공적인 J리그 진출을 이룬 선수 중 한 명.

K리그 통산 기록은 285경기 4525도움.

J리그 통산 기록은 82경기 13.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클래식 윙어로,

탁월한 왼발 킥력을 바탕으로

대표팀의 셋피스를 담당했으며 비셀 고베 시절에도

팀의 셋피스를 담당했다.

1997년에는 국대에서 셋피스로만 26도움을 기록했다.

강력한 킥보다는 정확하고 엄청난 커브를 자랑하는 킥으로

프리킥시 슛-크로스에서 모두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특히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니어포스트로 날카롭게 감기는

프리킥은 백미로 많은 프리킥골을 성공시켰다.

 

정확한 킥을 바탕으로 98월드컵 예선부터

한국팀의 주요 공격루트는

'하석주 크로스-최용수 헤딩'일 정도로 정확한 킥을 자랑했으며

당시 한국 선수 중 몇 안되는 달리면서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선수였다.

참고로 1997~1998년 당시 한국팀의 경기운영은

미드에 유상철-김도근을 박아 놓고 중앙을 커버하고

당시 하석주, 고정운, 서정원, 이상윤 등

우수한 윙자원이 넘쳐나던 행복한 시기라

양 사이드에서 하석주, 서정원이 무한 크로스를 올리고

최용수 or 황선홍 or 김도훈 헤딩이 주요 공격루트였다.

이 전술로 당시 탈아시아급 피지컬을 가지고 있던 한국은

월드컵예선을 승승장구하며 아시아를 평정하였고

최용수는 예선 득점왕에 등극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아시아 최고 공격수로 주목을 받았다.

 

이 공격루트에서 실질적으로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주로 하던 게 하석주였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당시 한국국대에서 잘하면

무조건 사고보던 J리그에도 진출했고

J리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당시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당시 PS1 시절 명작 게임 중 하나인

위닝일레븐 2000에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력18-패스17을 찍은 선수가 하석주다.

 

킥 뿐만 아니라 주력도 빨랐으며

드리블도 아시아에서는 충분히 먹혔고,

수비도 세계와는 격차가 있었으나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탑급으로 안정적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완벽하다시피한 No.1 윙백이며

발도 빠르고 드리블도 되는데

킥은 A급인 완전한 클래식 윙어.

또한 공격수 출신다운 득점본능으로 중요한 순간에

은근히 멋진 골도 많이 넣었다.

1995년 디에고 마라도나의 보카 주니어스 초청경기에서

1:0으로 뒤지고 있던 경기에서 8만 관중 앞에서

그림같은 다이빙 헤딩슛으로 동점을 만들기도 했으며,

1996년에는 마찬가지로 유벤투스 초청경기에서

국대로 출전,

종료직전 골을 넣으며 4:0 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통쾌한 왼발 중거리슛으로

1:0 승리를 이끈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11년간 A매치 통산 95경기 23골 기록으로

역대 득점 순위로만으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며

센추리클럽급의 맹활약을 했다.

비록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백태클이

너무나도 강렬해

그의 국대 커리어 내내 백태클로만 기억이 되지만,

왼쪽 윙/윙백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한시대를 풍미한

한국축구의 레전드라고 말할 수 있다.

 

골을 넣은 뒤 고유 세리머니가 있는데

양팔을 쭉펴고 계속 달리는

속칭 '비행기' 세리머니이다.

어릴 적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골을 넣을 때마다 기분이나 내려고

그 세리머니를 하게 되었다고.

 

하석주를 상징하는 고유 번호는 17번으로,

1994 월드컵 때는 16번을 달았으나

이후 쭉 국대 17번은 하석주의 차지였다.

 

지도자 시절

프로 팀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다가

모교인 아주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부임 첫 해에 전국 대학선수권에서 우승했고

다음 해에는 1, 2학년 대회에서 우승.

 

20128월 시즌 중 정해성 감독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K리그 사령탑으로 데뷔했지만,

이미 하위권으로 떨어진 전남의 성적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2013 시즌은 완전 젊은 선수들로만 꾸려 나가게 되면서

"하석주 유치원"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44세였던 김병지를 영입했음에도

팀 평균 연령은 24.9.

김병지마저 빼면 24.3세까지 떨어지는 판국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진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내기가 어려웠으며,

FA16강전에서는 김병지마저 빼고

2군을 내보냈다가 K리그 챌린지의 수원 FC

3:4로 덜미를 잡혀 탈락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리그도 하위권인 10위로 마무리하지만,

하석주는 아직 이를 갈고 있었다.

 

2014 시즌에는 어린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필드 플레이어로 수원과 계약이 만료되어

대한민국을 떠나 있었던 스테보와

성남 소속의 현영민을 낙점한다.

이외 대구 소속이었던 레안드리뉴와 크리즈만,

동의대의 도움왕이었던 안용우를 영입했고,

이들은 크리즈만 만 빼고는

대체로 기존 선수진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종호의 포텐이 터지면서

작년 전남의 골칫거리였던 빈약한 공격력을

완벽히 보완함에 따라 지난 몇 년과는 달리

상위권에 머무르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아쉽게도 하위권인 7위로 떨어졌다.

주요 선수들인 이종호, 안용우, 김영욱을

인천 아시안 게임 차출로 한동안 쓰지 못하면서

성적이 떨어진 데다가 1026일 있었던

33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오심 판정들로 3-3으로 비기면서

7위로 떨어진 것.

그래도 3명이 병역특례를 받은 건 다행.

 

20141112

전남 구단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노상래 수석코치에[게 자리를 넘겨준 후,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사퇴 이유는 분당에 거주 중인 가족 때문.

아내가 갑상선암으로 투병하며 너무 고생했고,

자녀들이 한참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거기에 장남은 군 복무 중이어서

기러기 아빠로만 마냥 살 수 없었다고 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린 결단에,

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자기의 모교이자

이전 지도팀인 아주대학교 축구부의 감독직으로 돌아갔다.

 

여담

  • 의외로 학부 전공이 경영학이다. 다만 예전 대학교 체육특기생들은 운동과 상관없는 전공에 적을 걸어놓는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 아들인 하윤수도 축구선수이다. 나이키 찬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 가끔 가다가 한화 이글스의 하주석과 헷갈려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하주석이 전역했을 때 뉴스기사에 댓글에서도 하석주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 최경록을 아주대로 진학하게 하는게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학년이 될 당시, 전남의 감독으로 부임해 제대로된 지도를 못했고, 독일로 떠나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최경록은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하석주에게 다짐했고, 지금도 종종 메시지 등을 통해서 안부를 묻는 사이다.
  • 2018년 6월 28일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나와서 밝힌 바로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백태클 사건 이후 미안한 마음에 차범근 당시 감독을 20년째 피해다녔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후유증이 가시질 않아서 항상 죄인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 백태클 퇴장[25]당한 이후 너무 충격이 커서 벨기에 전까지 훈련이 없으면 인근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며 맘을 달랬다고 한다.[26] 한 번은 큰 잉어가 잡혀서 기뻐해야 하는데 잉어의 맑은 눈을 보고 잉어를 안고 펑펑 울었다고... 하석주의 고백은 이날 방송의 백미로 주위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 김어준은 하석주같은 케이스가 있으니 함부로 국가대표에게 비난과 욕을 하면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후에 제작진이 차범근 감독과 만남을 주선한다고. 그리고 그 만남은 불과 한 주만에 성사되어 20년만의 감동적인 해후가 이루어졌고 차범근은 눈시울을 붉혔고 하석주는 차범근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최용수는 차범근, 하석주의 놀림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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