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프로필 (제20대 대통령 후보) :: 외시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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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프로필 (제20대 대통령 후보)

by 두용이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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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프로필 (제20대 대통령)

출생
1964년 12월 22일 (57세)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 지통마
(現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도촌길 505)
거주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양지마을1단지 금호아파트
본관
경주 이씨
현직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대한민국대전환 선대위 국가비전과통합위원회 공동위원장
재임기간

 
 
제19-20대 경기도 성남시장
2010년 7월 1일 ~ 2018년 3월 15일
제35대 경기도지사
2018년 7월 1일 ~ 2021년 10월 25일

 

 

출생지는 경상북도 안동군이다.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하여 소년공 생활을 하였다.

검정고시를 통해 중졸 · 고졸 학력을 취득한 뒤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계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경기도 성남시 일대에서

인권변호사 겸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에 처음 당선되었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3위로 낙선하였다.

이후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다.

 

20217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고,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여

20211010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소년공 시절

"공장 생활 6년 동안 쇠붙이와 화공약품이 내 몸에서 이름을 얻는 동안, 나는 이름조차 없던 소년 공돌이였을 뿐이다."
자서전 '이재명의 굽은 팔' 중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시로 이사를 왔고,

너무 가난해 남들 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

이재명은 성남 상대원 공단의 공장에서

소년공으로서 삶을 살았다.

그는 공장일 대신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이를 막았고,

이런 아버지를 증오했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2021년 어버이날을 맞아 이재명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젊은 날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필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날"이었다고 적었다.

"돌아보면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그 강렬한 원망이 나를 단련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마음의 어둠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난보다 아버지를 더 증오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가난 때문에

자신을 공부하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직장은 염산과 황동을 다루는 목걸이 공장이었고,

2번째 직장은 붕산으로 땜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사장의 야반도주로 월급을 떼였다.

3번째 공장에서는 고무 조각이 손가락에 박혔는데

파편이 아직 박혀 있다고 한다.

4번째 직장 땐 날카로운 함석에 찔려 흉터가 많다.

작업반장의 구타로 인해 난청과 부분적 청각 장애도 얻었다.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글러브 공장에서

프레스 기에 왼쪽 손목 바깥쪽이 끼어

손목 관절이 으깨지는 골절을 입었으나

당시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인 치료는 받지 않았다.

본인 피셜로는 어린 마음에

이런 걸로 아파하면 뭐라 할까봐 그랬다고.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고 하며

제2국민역 판정으로 병역이 면제됐다.

병무청 군의관이 엑스레이를 보면서

"이 새끼 이거 개판이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상처가 됐던지 공석 사석에서 곧잘 언급한다.

 

대학교 진학

1982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재명의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이 가능했던 건

순전히 장학금과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 지원 덕분이었다.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입학금, 등록금 면제는 물론

매월 20만 원가량 용돈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사준 제복을 입고 대학교에 갔다.

여담이지만 이재명이 입학하기 전인

70년대 중반 이미 대학교 제복은 사라진 상태였다.

가족들도 그냥 대학생은

제복을 으레 입는 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못 다녀봐서 그런지 오히려 좋았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어머니가 제복을 사주실 때도

가만히 있었다고.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알고도 가만 있었다는 투긴 하다.

어쨌든 입학식날 제복을 입은 사람은 자기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장에서 일하던

셋째 형 이재선에게 대입 시험을 치르게 했다.

중앙대에서 매달 주는 용돈을 쪼개 주겠다고

형과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이후 이재선은 4년 등록금과 생활보조금을 받는

건국대학교로 진학해 공인회계사가 됐다.

 

사법고시 합격

선배들에게 사법시험에 관해 들으며

장애인이라 취업이 힘든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 때 학생운동에도 처음 관심을 가졌으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1986년 사법시험에 붙기 직전 청소부였던 아버지 이경희가

위암으로 위독해 입원했는데,

문병을 가니 아버지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그놈을 내가 거길 (법대를) 보냈어"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한다고 밀어주기는커녕

모든 가난의 원인이었던 아버지였지만,

이 마당에 구태여 뭐라 반박하기도 그래서

그저 맞다고 했다고 밝혔다.

 

 

19861023일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급히 병세가 나빠져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 귀에

합격했다고 보고를 했지만 이미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생일에 합격 통보를 받는 겹경사였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며칠 후 부친상을 당했다.

 

1987년 사법연수원생 시절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에 감명받았다.

굳이 판검사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구나란 생각,

그리고 인권변호사로서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뜻으로

연수원생 신분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반대 연판장을 돌렸다고.

한 인터뷰에서는 잘릴 각오로 썼는데

잘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사회운동가 활동

어쨌든 이후 자신은 바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주변에 말하고 다녔고,

결국 변호사 겸 성남 지역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사법시험에 붙으면

검사 판사를 누구든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의아해 하는 모친에게는 성적이 안 좋아서

변호사를 하는 것이라 둘러댔다고 한다.

 

실제 이재명의 연수원 성적은

판사는 지방권 임용 가능,

검사는 상위권 임용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모두 거부했다.

당시에는 연수원 성적이 우수한 이가

판검사 임용을 거부하는 경우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이재명의 연수원 성적이 낮다고

오해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나서는 26살의 젊은 나이로

경기도 이천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고

3년 동안 노동자, 농민을 위한 권익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변호사 사무소 개업 전

조영래 변호사 아래에서

망원동 수재 사건의 변호를 돕는 자원봉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재명이 자신만의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려고 할 때

조영래 변호사가 이재명으로 하여금 은행에서

500만 원을 빌릴 수 있도록 보증을 서 주었다고 한다.

 

변호사 활동

성남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인천시와 광주시의 노동상담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을 하는 등

사회운동 뿐 아니라 인권 변호사 활동도

활발히 했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수임했던

30여건의 사건을 시사저널에서 전수분석한 결과

살인, 강간, 폭행 등 형사사건 50여 건을 변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1995년, 당시 안기부에 체포되어 조사 도중 고문받던 김태년 당시 청년단체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96년, 민주화 운동을 하다 당국에 붙잡혀 수사 받던 도중 분신 자살 기도를 한 경희대학교 학생을 무료로 변론해주었다. 
  • 2006년 5월, 자신의 조카가 강동구 암사동에서 전 여자친구 모녀를 살해하자 변론을 맡아 조카가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 2007년 3월에는 이종조카가 중학교에 다니는 중 성남시의 조폭조직인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이었는데, 그 때 4번에 걸쳐 문제가 생길때마다 변론해주었다고 밝혔다. 정확히는 국제마피아파 조직원 3명과 조카가 범죄단체 구성으로 인해 기소당했는데 그 중 두 명의 변호를 맡았다. 이 조카는 위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조카와는 다른 조카이다.
  • 2007년 8월, 흉기와 농약을 준비해 딸이 보는 앞에서 그 어머니인 연인을 흉기로 8차례 찔러 죽인 사건에서도 변호를 맡았다. 해당 사건에서도 이재명 변호사는 심신미약 및 심신상실을 주장해 피고인의 형기를 징역 15년으로 감형받았다.
  •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와 관련해 일본 외무성측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사실이 요미우리 신문 단독 보도로 확인되자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벌이다 체포된 대학생 7명에게 수사 대응 방법을 알려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했다.

 

정치 입문

성남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6년 지방선거를 즈음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단수 공천으로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한다.

결과는 전직 시장인 한나라당 이대엽 후보에 밀려 낙선.

 

이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경선에서 조성준 후보에 밀려 공천 탈락하고,

대신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고흥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정치 생활 초기엔 그 유명한(...) 정동영의 지지자.

그것도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일명 정통, 정통들)의 대표로 선발되어

탄돌이로 활동하였으며,

그 모습이 뉴스에 나오거나 인터뷰로 다뤄지기도 했다.

후일 이 시기를 얘기하면

'내가 뭐 졸도 아니고'같은 반응을 보이며 선을 그었지만,

정동영이 다양한 방면으로 지원하는 것을 보면

정동영계라고 보긴 애매해도 한동안 접점이 이어졌다.

 

시기는 명확하진 않으나,

정세균 아래에서 민주당 경기동부지역 책임자

활동했다고도 한다.

한동안 정세균계 정치인으로 분류됐다.

 

성남시장 재임 시절

 

2010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해

51.2%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다.

20146.4 지방선거에서도

55.1%의 득표율을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심지어 부자동네라 서울의 강남권에도 비견되는

보수정당 강세지역인 분당구에서도 승리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시장이 된 직후 화제가 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시 재정 건전화에 착수했으며,

한편으로 공무원들의 매관매직 인사관행을 개선하였다.

 

이후 20146.4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 재선에 도전하였으며

첫 당선 때보다 득표율이 3.9%p 더 올라

55.1%의 득표율을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특기할 점은 이재명이 진보 성향이 매우 뚜렷한 정치인인데

새누리당 강세 지역인 분당구에서도 득표율이 올랐다는 점.

첫 성남시장 선거에 당선됐을 때보다 무려 3.9%p가 증가하였다.

 

고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 시장실을 저층,

2층부의 앞쪽으로 옮겨간 것은 물론,

부정부패를 막겠다며 시장실에 CCTV를 설치하라고 직접 지시하고

시민들, 특히 어린이들의 방문을 받는 등

개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시립 의료원 건설, 노후 주택 리모델링 지원,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건설 추진 등

친서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건설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무단강행을 했으며,

남경필 당시 경기도지사는 이 강행에 대해 소송을 걸었다.

이에 대해 해당 토론회에서 이재명은

왜 다음해엔 소송을 걸지 않았냐고 질문을 했는데,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심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추가로 소송을 걸지 않았다고 답이 돌아왔다.

단지 부패 세력에 대한 강경 발언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력 덕분에 문재인 전 당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함께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언급될 정도로

그 지지도가 상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남시장 재직 당시 공약 이행률 94.1%를 기록하였다.

 

경기도지사 재임 시절

차기 대권 주자로서 다음 행보에 많은 관심이 모였는데,

체급을 올려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택했다.

일각에서는 서울특별시장 출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지만,

본인이 박원순 서울시장이 3선에 도전한다면

자신은 서울시 지방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성향을 지닌 식구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

중앙정계 진출의 경우 그의 장점인 행정능력을 내세우기 힘들고,

같이 경선에 참여한 안희정 전 지사에 비해

당내 주류인 친노/친문 의원들하고 접점이 별로 없어

처음부터 잘 이야기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동안의 경기도지사들은

대부분이 손학규, 남경필과 같은

보수정당 소속 개혁파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던만큼

만약 이재명이 현 도지사인 남경필 지사나 

자유한국당에서 세운 후보 등 보수후보들을 제치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된다면

중도진보정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있어서

아주 큰 수확이 될 것이며

이재명의 정치적 위상도 한층 더 높아질 것임이 자명하다.

 

전해철, 양기대 후보를 제치고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여 

경기도지사 후보 선출이 확정되었다.

참고로 일반 안심번호 여론조사에서는

이재명이 65%대로 압도했지만

권리당원 투표에서는 이재명을 싫어하는

친문 권리당원들의 결집으로 전해철과 경합이 나왔는데, 

실제로 친문 성향 사이트들에서는

이재명에 대한 비토가 심해서 전해철을 지지하고

전해철이 경선 탈락 하니 이재명에게 표주기 싫다,

어떻게든 후보 등록 전에 사퇴시키거나

설령 남경필이 재선해도 문통과 민주당에

해가 될 암세포를 적출한 거니 상관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재명으로서는 일반 여론에서의 우세를 지키고

민주당 내부의 비토 세력을

어떻게 설득하고 달랠 것인지가 큰 숙제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2021년 7월 1일 “국민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닌

주권자를 대리하는 일꾼으로서

저 높은 곳이 아니라 국민 곁에 있겠다”며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https://youtu.be/bgHdPY2QK1g


이날 영상을 통해 출마 선언을 하며

“자랑스러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토대 위에

필요한 것은 더하고,

부족한 것은 채우며,

잘못은 고쳐 더 유능한 4기 민주당 정권,

더 새로운 이재명 정부로 국민 앞에 서겠다”고 밝혔다.

“위기의 원인은 불공정과 양극화에 있다”며

“공정성 확보, 불평등과 양극화 완화,

복지확충에 더해 경제적 기본권이 보장돼

모두가 최소한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여야

지속적 성장과 국민의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를 읽으면서

시작한 출마 선언에는

공정이 7번,

불공정이 6번,

성장이 11번 언급됐다.

2017년 출마선언에서 언급 횟수가

4번에 그쳤던 ‘성장’의 비중이 이번엔 더욱 커졌다.

 

2021년 10월 25일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2022년 3월 9일 대통령선거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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