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대낮에 선죽교에서 사망
정몽주 프로필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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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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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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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達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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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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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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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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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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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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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영천 (現 경상북도 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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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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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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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8년 1월 13일 ~ 1392년 4월 26일
(54년 3개월 13일, 19,828일) |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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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7년 12월 22일 ~ 1392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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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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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文忠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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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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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양군 충의백(益陽郡 忠義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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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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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군(永原君)[1387년]
익양군 충의군(益陽郡 忠義君)[1388년]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 영천 출신이다. 본관은 연일, 호는 포은(圃隱)이다. 1392년 4월 26일 이방원의 부하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 당한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말기의,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려를 살리기에는 고려는 이미 안에서부터 기울은지 오래였었다.
여말삼은(麗末三隱, 혹은 고려삼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삼은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吉再), 목은 이색을 꼽는다. 여말삼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 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는다.(길재 등은 이들 사림파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결국 중종 대에 문묘에 배향되게 된다.)
선지교의 피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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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을묘일(음력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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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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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고, 판전객시사(정3품)이던 조영규를 비롯한 일부 부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죽였다. 태조강헌대왕실록에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어 판개성부사 유원의 문상을 갔다 오느라 원래 다다르기로 예정되었던 곳에 정몽주가 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이방원이 초조해 하는 모습도 실려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습격하는 조영무 등에게 고함을 지르다 타고 있던 말이 먼저 칼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것을 다시 일어나서 집 쪽으로 뛰어가려다 뒤따라온 고여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선지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사실 이성계 낙마~정몽주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 정정과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 정정도는 유배되었다. 유배된 동생 정정도는 살아남아 형의 문집을 발간했다고 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정몽주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만은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아 그들은 무사했다.
아들이 독단으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는 대노하여 이방원을 크게 혼냈다. 실록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크게 화를 내는 자리에 신덕왕후가 곁에 있었지만 이성계가 너무 화를 내서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한창 한소리 듣던 이방원이 나중에 "어째서 어머니께서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자 신덕왕후가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말했다고. 사실 이성계 본인은 그다지 정몽주를 죽일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정몽주를 죽이면 자신만 욕을 먹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결국 정몽주를 역적으로 죽였다고 선포하며 그의 목을 효수했다.
실제 정몽주는 이성계를 직접적으로 위해할 군사력이 없었고, 이성계를 설득해 고려왕조를 유지한 채 온건개혁책을 펼 것을 설득하려고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기도 했는데, 정도전 또한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와 만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는 강경파들만 이성계에게서 떼어내면 이성계를 설득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걸 수도 있다. 실제로도 이성계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은퇴를 희망하는 등 정치적 투쟁에 지쳐 있었고, 마음이 거의 찬탈의 야심으로 기울긴했지만 500년 고려 사직을 직접 끝장내는건 역시 부담이 큰 일이라 고민은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방원의 이런 행동에 이성계는 굉장히 불쾌했던것 같고, 이것이 이방원을 세자로 삼지 않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후 조선이 개국되고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태조실록에서 정몽주를 죽인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누가 비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의 말로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디스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의 정몽주에 대한 사적인 친분은 차치하고 수십년간 공을 세운 명신을 명분도 충분히 없이, 심지어 국가의 명령 형태를 갖추지도 않고 사적으로 암살한 일이니 당연히 옹호가 불가능하다. 이색이나 이숭인을 죽이듯이 억지 명분으로라도 탄핵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곤장을 쳐서 죽이는게 정치적 부담이 훨씬 덜한 방식이다.
https://tv.kakao.com/v/42526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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