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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탄생' 제작발표회

by 두용이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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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탄생' 제작발표회

영화 '탄생' 제작발표회가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S씨어터에서 열렸다.

 

참석자

이날 홍신 작가, 남상원 대표, 박곡지 대표, 박흥식 감독, 배우 윤시윤,

안성기, 이문식, 정유미, 이호원, 송지연, 하경, 임현수,

염수정 추기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용훈 주교,

오세훈 서울시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황명선 논산시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영화 '탄생'

영화 ‘탄생’은

올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성 김대건 신부의 인생을 다룬다.

내년 개봉 예정이다.

 

김대건 신부님

성장 배경과 신학생 선발

김대건 신부는 1821821일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일명 솔뫼’)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과 고()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이 재복(再福)으로 불리던 김대건은 김해 김씨(金海 金氏) 안경공파에 속하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치명자 집안이었다. 그가 7살이 되던 해(1827)에 삼남(三南)지방에서 벌어진 정해교난(丁亥敎難)을 피하여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사하여 거기서 약 10년간의 유년시절을 보낸다. 김대건의 집안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므로 김대건은 어린 시절부터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때부터 김대건은 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워 익혀 깊은 신심을 키워 나간다. 그가 첫영성체를 받은 것은 18366월에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인모방 신부가 공소를 순방할 때이다. 거기서 모방 신부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김대건의 깊은 신심을 보고 성소를 확인하게 되었고 신학생으로 선택하게 된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도 외국인 성직자들이 전교하기 보다 본국인(本國人) 성직자이면 지리에도 밝고 풍습과 기후, 언어의 장벽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교회에 대한, 겨레에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1836년 겨울에 멀고먼 이역 만리인 마카오로 신부가 되기 위해 떠나게 된 계기인 것이다.

 

6개월 여 동안의 기나긴 여정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같이 간 동료 신학생들(최양업, 최방제)과 함께 파란만장한 유학생활로 접어든다.

 

마카오 유학

모방 신부는 183612월까지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낼 계획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자신과 4-5개월밖에 같이 있지 않았던 김대건의 파견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어 김대건을 다른 2명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836123(음력 1025) 조선 신학생 3명에게서 서약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로 여항덕(余恒德, 피치피코)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이광열(요한)등 조선 밀사들에게 신학생들을 인도해 주도록 하였다.

 

한편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샤스탕(Chastant, 1803-1839) 신부는 1228일에 조선에서 여항덕 신부와 신자 일행을 만났다. 이후 김대건은 18422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6개월 동안 극동 대표부 안에 마련된 조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최방제의 죽음을 맞이하였고, 18394월 마닐라로 피산하게 된다. 1839년의 마닐라 피신은 아편문제로 광동과 마카오에서 소요(騷擾)가 일어난 탓이었다. 이때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 신학생들과 2명의 코친차이나 학생들, 그리고 몇몇 선교사들을 필리핀으로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원 참사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53일에는 그곳에서 마련해 준 롤롬보이(Lolomboy)수도원으로 가서 1126일까지 약 6개월 반을 생활한 뒤 마카오로 귀환하였다.

 

마카오와 롤롬보이를 오가는 동안 김대건은 신학 과정에 필요한 내용들을 여러 신부들로부터 교육받게 되었다.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는 임시로 설립되었던 탓에 교사나 교육 과정이 제대로 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김대건은 이후 르그레즈와, 칼레리, 리브 신부 등의 7명의 스승에게서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하게 되었다.

 

서품과 순교

신학생 김대건은 리브와 대표 신부의 명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Cecile)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에 탑승하였다. 1842215일에 마카오를 떠나 1차 조선 입국로 탐색 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동료인 최양업도 만주 선교사인 브뤼니에르(de la Bruniere 1816-1846) 신부와 함께 717일에 파코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 817-31일에는 김대건 일행과 합류하였다. 그 후 그는 184812월 양관(陽關)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442월 두만간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같은 해 12월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김대건 부제는 184511일 책문에서 밀사들을 만나 의주(義州)를 통해 입국하였다.

 

1845115, 서울에 도착한 이후 김대건 부제는 조정에서 이미 자신이 외국에 나간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친인 고 우르술라에게도 도착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선교사들이 거처할 집을 구하고, 페레올 주교와 약속한 대로 상해로 그를 모시러 가기 위해 배 두 척을 구입하였다.

 

그 후에 1845817일 상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司祭品)을 받고 8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서품을 받은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1818-1866) 신부,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831일 상해를 출발하여 1012일에는 충남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845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으며, 도중에 서해(西海) 해로(海路)를 통한 입구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1846514일에 마포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황해도롤 가서 중국 배에 서한(書翰)과 지도(地圖)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5(음력 512) 순위도 등산진<巡威島 登山鎭>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916(음력 726)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았다.

 

서한과 저작

김대건 신부는 라틴어와 한문,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하였다. 1842년 통역자로서 프랑스 함대에 승선할 정도로 프랑스어에도 능숙하였다. 이점은 1845년 상해에 도착하여 영국인들에게 프랑스어로 도움을 청한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라틴어로 서한을 작성하였다. <훈춘 여행기>라고 명명한 18441225일자 서한을 한문으로,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廻諭文)>만을 한글로 작성하였을 뿐이다. 김대건 신부가 남긴 서한은 모두 31통이었으나, 수취인에게 도달한 것은 22통뿐이었다.

 

다음으로 김대건 신부의 저술로는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시험 답안지인 <라틴어 작문> 2건과 서한이자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훈춘 여행기>, <조선전도(朝鮮全圖)>,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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