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생애 (265대 교황)
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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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
(Joseph Aloisius Ratzinger)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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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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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마르크틀암인
(現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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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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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1일 (향년 9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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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시국 바티칸 시티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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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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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대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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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9일 ~ 2013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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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대 교황으로, 교황 빅토르 2세 이후 950년 만에 선출된 독일인 교황이자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생전 퇴위한 교황이다.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를 꼽으라면 예외없이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걸출한 석학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 기간에 오랫동안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았고 평생 정통 가톨릭 신앙 수호에 매진해 왔다.
8년간 재위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2013년 자진 퇴위하였는데, 교황은 종신직이므로 당시만 해도 생전 퇴위를 상상하지 못했으므로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퇴위 발표시 그 충격은 상당히 컸다. 퇴위 이후에는 '명예교황'이라는 뜻의 'Pope Emeritus'로 불렸으나 2022년 사망하기 전까지 집필과 기도 등으로 소일하며 조용히 지내면서 후임자의 권한 행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비록 일반 대중 사이의 인기는 전임자와 후임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신앙과 믿음, 학문적 깊이와 성품, 신조를 아는 여러 신자들로부터 퇴위한 이후까지도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유년기
1927년 4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에른 지방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질서경찰이었고, 티롤 출신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갔는데, 이런 집안 분위기를 따라 어린 라칭거도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1932년 이웃 동네 뮌헨교구의 대주교가 고향마을에 찾아와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어린 소년 라칭거도 성직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영성체를 받았는데, 먼 훗날 교황이 되어서도 이 두가지 경험을 잊지 못하는 순간으로 회고하기도 했다.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에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고 영국의 황색언론 더 선이 폭로한 적이 있고, 실제로 1943년에 가입해 대공포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치 독일에서 청소년들의 히틀러 소년단 가입은 자유 의사에 관계없는 필수이자 강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징병제였기 때문에 소년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에게는 선택의 여지따위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미래의 SS를 위한 인재 양성 및 예비 군인을 키우기 위한 청소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창설한 것이 바로 히틀러 유겐트였다. 전쟁 직전이었던 1938년에는 모든 청소년 단체를 해산시키고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시켰다. 게다가 라칭거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경찰에 근무한 것을 빼고는 나치에 그리 접점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공무원이라는 특성상 어쩔수 없이 정부의 지시를 따를 뿐 나치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형이 T4 작전에 휘말려 살해당했으며, 다른 친척들도 반나치 성향 때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지금은 언론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다.
전쟁이 점차 막장이 되어가던 1943년에는, 연합군 폭격기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독일을 맹폭격했다. 이 때문에 피해가 극심해지자 독일 국방군은 대도시에 대공포대를 증설하는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남자라곤 1명도 남기지 않고 박박 긁어다가 죄다 전쟁터로 보내고 나니 대공포반 운용 요원이 부족했던 것인데, 때문에 여자, 소년단,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까지 대공포반 인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유머로 "신사(예비역이던 남자들), 숙녀(여자), 어린이(소년단),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이라고 할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즉, 애초에 미성숙한 나이에 강제적으로 복무한 것이기 때문에. 이 경력이 크게 지적받지는 않았다.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히틀러 유겐트 등 나치 조직도 흐지부지 되었고, 라칭거 역시 조직을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다 미군에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성년자임이 참작되어 귀가조치 된 후로는 여느 청소년 가톨릭 신자들과 같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진보에서 보수 신학자로
바이에른 지방은 16세기 종교개혁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지방이었다. 튀빙겐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던 마이클 파헤이 신부(예수회)는 "베네딕토 16세는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바이에른 사람이며, 이는 곧 그가 완전한 가톨릭 배경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배경에는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 역시 포함되는데, "나치당의 고향"이었던 바이에른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을 가진 인구였기 때문이다.
형 게오르크 라칭거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년여 간 고향 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한 것을 제외하면 신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뮌헨 대학과 프라이징 대학을 거쳐 본대학에서 당대 독일 신학계의 위대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탐구에 빠져들었다. 20여년간 대학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뛰어난 강연과 저술 등을 쏟아내며 당대 정상급 신학자로 활동했다. 스스로도 신학교수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는 32살에 불과했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모든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는,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자신을 가리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성경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2권의 책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교수 자격 논문을 쓰면서는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그가 가장 좋아한 현대 신학자는 나치에 강력히 저항했던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해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신부도 그가 빠져든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라칭거는 원래는 진보적 성향의 가톨릭 신학자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참여한 대표적인 개혁적 신학자였다. 얼마나 진보적이었느냐면 "교황은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교회 안의 다른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고, 종교재판소의 후신인 성무성성(聖務聖省)의 폐지를 요구하는 연설문의 초안 작성을 한스 큉 신부와 함께 했으며, 대놓고 성무성성 장관인 오타비아니 추기경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훗날에 성무성성의 후신인 신앙교리성의 수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다 프랑스 68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독일 대학생들의 시위로 큰 충격을 받고 보수쪽으로 변화했다. 당시 신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의 급진적인 학생들이 진보적 성향의 교수들까지도 수업을 방해하고 마이크를 빼앗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충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등의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내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열광한 나머지 전체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1977년 주교 서품과 함께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대구장에 임명되어 1982년까지 재직했으며, 사목표어를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력자)'로 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됐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독일에서 학생신부로 공부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시 독일 뮌스터 대학에 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회 쇄신에 관한 강의를 개설해 후배들을 가르쳤는데, 김수환 학생신부가 수강생 중 하나였던 것.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는 김 신부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바티칸을 국빈 방문했을때 베네딕토 16세가 김 추기경의 안부를 물으며 "뮌스터 대학 시절 그가 독일어를 매우 잘해서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고 인증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던 정치인 김종인의 자서전에선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 신부의 학사학위 지도를 맡았던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수품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어 요제프 라칭거 교수신부가 새롭게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독일에선 지도교수가 바뀌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데다 라칭거 신부가 엄청나게 깐깐하게 굴어서 김 신부가 학업을 포기했다고. 김 추기경의 공식전기에선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떠난 뒤 1년이 넘도록 새로운 교수신부가 배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언급된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미사 중에 사제급 추기경들 중 최선임자로서 베네딕토 16세에게 순명 서약을 하게 된다.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돼 바티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프리메이슨 등 가톨릭교회의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반교회적 주장 및 단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우고, 교황무류성에 대한 의혹과 맞서 싸운 게 대표적 예다. 또한 1983년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통해 프리메이슨에 대한 교회의 단죄를 재확인했다. 그는 훗날 "(신앙교리성에 들어올 때) 로마의 직무 가운데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은 상당 부분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털어놓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적지 않은 진보 성향의 사제들 및 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을 지지했지만, 교황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복음이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며 훈령 자유의 전갈과 자유의 자각을 통해 거듭 경고했다. 특히 라칭거 추기경은 일부 사제들이 반정부군에 합류하거나 교도권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마르크스 혁명의 시초"라고 판단했다. 라칭거는 유명한 해방신학자들을 바티칸으로 소환하여 논쟁을 벌이며 "교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전력도 있었다. 게다가 교황에 대한 비판은 절대 용납하지 않은 탓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함께 했던 진보 신학자인 한스 큉이 교황무류성 교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수업 및 저서 출판 금지를 결정하는데도 관여했다. '전차 추기경' 이란 별명도 이러한 전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성 사제 서품 문제만 하더라도, 교황청은 「논 포수무스(Non Possumus) 등 교령과 사목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불가 입장을 밝혔다. 여성 차별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그는
"여성 사제서품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틀을 (모두 남성인) 12사도로 하셨고, 그 후계자로는 주교와 사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이 틀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에 따르는 것이 순명이며, 오늘날 상황에서는 매우 힘든 순명의 행위입니다."(대담집 「세상의 빛」 230쪽)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앙교리성 장관시절 교황청 신앙교리성, 경신성사성, 성직자성과 함께 여성 부제서품에 관한 공지를 발표해 "교회의 규율에는 여성 부제서품 가능성이 없으므로, 어느 모로든 부제서품을 위하여 여성 후보자를 준비시키는 교육 계획의 착수는 합법적이지 못하다"고 공지하였다.
또한, 1960년대 성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적 문화적 조류를 타고 일부 성직자들이 타락하여 아동 성추행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위 도표에서 주목할 것은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건수와 기소 건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 해이다. 바로 1981년도이다. 그 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2년째 되는 해이자,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된 해이다.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하면서 타락한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건수가 급격히 줄어, 1995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쥐구멍이 차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학적 오류와 싸우고, 교설(巧說)을 배격, 교회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그에게 중세시대 이단심문관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적지 않은 비난도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신학자들의 실험장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교황청 표준 교리서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1992년)와 교리 공식 요약서(2005년)의 편찬을 총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교리 공식 요약서는 그가 교황에 즉위한 직후인 2005년에 반포되었다.
추기경 시절에 작성된 각종 서신 등의 영문판에는 RSV 영어성경이 표준 성경으로 인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NRSV 영어성경과 NAB 영어성경 시편 개정판이 미국 가톨릭에서 전례용으로 승인받은 것을 철회시킨 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 영어의 성 중립적 표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Liturgiam authenticam을 참조할 것. 그나마 NRSV, NAB, NJB 성경의 개인통독, 연구용으로의 인가까지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의 극보수 성향은 아닌 듯. 사실 NRSV 같은 성경은 개인통독, 연구용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덧말도 한 바 있다. 다만, 전례용으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입장일 뿐.
취미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애묘가. 추기경 시절 길냥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보살폈으며, 고양이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지만 교황으로 선출되어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의 교황 취임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한 추기경은 "그 분이 고양이를 좋아한다(love)는 소문은 틀렸습니다. 그 분은 고양이를 흠모(adore)합니다."라고 증언했다. 진정한 cat holic.
또한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일례로 독일 뮌스터대학교에 출강하던 시절에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는데, 바지가 자전거 체인에 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전거 체인에 낀 바지를 어떻게 빼야 하는지를 몰라서 다리 한 쪽을 자전거에 걸치고 한 발과 두 바퀴로 그대로 학교까지 가서 지나가던 학생에게 바지 좀 빼 달라고 했다고. 학생이 페달을 뒤로 쓱 돌려서 바지를 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고 있었던 1997년에는 당시 바티칸 도서관장이었던 라파엘레 파리나 추기경에게 "바티칸 비밀고문서보관소에서 학술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싶다"고 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신앙교리성 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곡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소싯적에 다소 큰 소리로 쳐서 이웃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교황 선출 다음날에도 피아노를 치기 위해 옛 거처를 깜짝 방문해 여러 시간 연주할 정도로 피아노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신학적 성향
흔히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이 '보수'라 표현되고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그의 신학적 성향을 '보수' 두 글자만으로는 압축할 수 없다. 다음은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에 대한 입장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역사비평적 방법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조상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
-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1권, 바오로딸 출판사, 14쪽 |
다음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 |
이 두 가지에서 볼 수 있듯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은 교도권 내 전통 가톨릭 성향 신자들과는 거리가 있으며, 현대 가톨릭 신학의 교과서적 입장에 훨씬 가깝다.
신학자들에 대한 평가도 읽어볼만하다.
Q: 교황님은 어떤 신학자를 최고로 여기나요? A: 저는 개인적으로 뤼박 추기경님과 발타자르 추기경님을 꼽고 싶습니다. |
Q: 교황님은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항상 미사성제로 시작했습니다. 튀빙겐에서는 상당히 낯선 것이었지요. 또한 교황님은 제자들과 함께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 카를 바르트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A: 저는 비록 바르트 교수님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쇤겐 신부님에 의해서 이미 그분의 팬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성장하게 한 신학의 스승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바르트 교수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절친한 친구였던 발타자르 추기경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여행도 했습니다. 그분이 매우 연로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분을 만난 것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Q: 교황님은 그를 매우 존경했나요? A: 네,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분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2011년 독일 여행 때 학장인 슈나이더 신부님이 말하기를, 바르트 교수님이 항상 학생들에게 "라칭거의 책을 읽어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 《마지막 이야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페타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옮김 |
종합적으로 말해서,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이 보수적이라고 할 때 '보수'의 의미는, 수구적이라는 의미보다는 교과서적이라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제도권 내 전통 가톨릭 성향(19세기~20세기 초 신학)과는 거리가 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현대 가톨릭 신학의 교과서적 입장에 충실한 인물이다.
교황으로서의 삶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한 마디로 평하면 그의 사목 표어이기도 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가톨릭 교의와 전통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에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교황 재임 8년 동안에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풍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와 싸웠다면,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주의 및 도덕적 상대주의와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무기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이었다.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도 르콩드는 「마지막 유럽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에서 "교황은 유럽사회가 하느님 때문에 불편해지는 걸 싫어한다면, 이는 세속주의ㆍ냉소주의ㆍ소비만능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주의에 물들어 쇠약해졌다는 뜻이라고 여긴다. 그에게 상대주의는 종교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언젠가 "교황으로 선출됐을 당시 단두대 도끼날이 내 목에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교황직의 중압감을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도끼날'에 비유할 만도 했다. 그는 콘클라베가 열리기 며칠 전 78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만 해도, 설레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은퇴계획을 늘어놓았다. 은퇴 나이도 한참 지난 터였다. 그런 마당에 12억 가톨릭교회의 수장(首長)이라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도끼날은 아니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의 평전을 쓴 미국 가톨릭 내셔널지의 바티칸 통신원 존 알렌은 "그를 만날 때마다 수줍음과 넘치는 기지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교황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교황이) 끊임없이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고 마치 스타처럼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하고 기자에게 반문한 적이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만 봐도, 그는 군중 앞에서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하는 스타형이라기보다는 책에 파묻혀 진지한 눈빛으로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풍이다. 실제 그는 교황 선출 직후 다른 건 몰라도 수십 년 손때 묻은 책과 책장으로 가득한 서재만은 통째로 교황청으로 옮겼다.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미래를 결코 장밋빛으로 전망하지 않았다. 이미 추기경 시절부터 기독교는 다시 소수 종교가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교회는 가까운 미래에 더 이상 단순히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삶의 형식이라는 지위를 잃을 것이다. 교회는 앞으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거대 사회와 관계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소수인의 교회가 될 것이다. 신앙에 따라 사는 진짜 독실한 신자들로 이뤄진,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모임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 |
대담집 「이 땅의 소금」 197ㆍ260 쪽 |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의 성추문에 대해서도 그는 엄정한 조치를 취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성직자가 각각 135명, 67명이 자발적 환속을 했고, 각각 125명, 57명이 사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말년인 2011년과 2012년 두 해에만, 거의 400명의 사제가 면직된 셈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아동 성추행 사제 400명 성직 박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 「전례의 정신」에 비춰보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가톨릭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의 전례행위에도 몇 가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사 중 전례무용 공연이나 퍼포먼스식 예물 봉헌, 제단 십자가 위치, 무릎 꿇기, 입 영성체 등의 문제다.
최근 들어 큰 행사나 미사에서 전례무용 공연을 종종 보게 된다.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몸짓기도는 행사의 기쁨이나 미사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교황은 "전례를 매력적으로 구성하려고 댄스 팬터마임을 끼워 넣는다면 박수갈채로 이어지는 일은 있겠지만, 그 전례는 더 이상 전례가 아니다"며 미사전례 중에 춤이 등장하는 데 이견을 보인다.
"어떤 경우든 전례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박수갈채가 터진다면 그것은 전례의 본질을 상실한, 일종의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오락이라는 증거다. 그런 식의 매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교황은 "미사전례의 핵심, 또는 진정한 행위는 '성찬 기도(oratio)'이며 독서ㆍ성가ㆍ예물준비 같은 외적 행위들은 부차적"이라고 말한다.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이 이런 외적 행위들을 부각시키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황은 "외적 행위들은 본래 많지 않았는데 인위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예물준비 과정에서) 연극무대에 등장하는 듯한 행동이나 그 행위자는 전례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외적 행위들이 본질이 되면 그 본연의 모습인 테오-드라마(Theo-Drama), 즉 하느님의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고 일개 패러디로 변형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지어지고 있는 성당에서는 십자고상이 사제와 신자 사이 시야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지 제대 위나 뒤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 세워둔 경우가 있다. 교황은 이에 대해 "십자고상이 미사를 드리는 동안 방해가 된다는 말인가? 사제가 주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라며 이의를 제기한다.
십자고상이 제대 한가운데 자리해 사제와 공동체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는 '주님을 향하여'라는 말에 따르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구심점이다.
2008년 1월 13일 베네딕토 16세가 시스티나 경당에서 집전한 미사 장면.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마주보는 오늘날 보편적인 모습의 미사와는 달리, 사제와 신자들이 모두 제대 위 십자고상(Ad Orientem; 전례적 동쪽)을 바라보며 미사를 드리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을 바라보지 않는 미사에서도 교황은 대부분 제대 가운데 십자고상에 시선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베네딕토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을 통해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게 되면서 사제(주재자)가 전체의 실질적 구심점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도 하였다. 미사의 방향성을 중요시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태양이 뜨는 (우주적 의미를 지닌) 전례적 동쪽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제대 가운데 십자고상을 배치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깊이 굽히는 동작으로 무릎 꿇기를 대신하고 있다. 장궤틀도 사라져가고 있다.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혹은 두 무릎을 꿇는 자세가 한국인에게 어색해서다.
그러나 교황은 "신약성경에 무릎꿇기(proskynein)라는 말이 자그마치 59번이나 나온다. 무릎꿇기는 기독교적 자세일뿐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자세인 셈이다"고 말한다. 또 "현대 문화에 무릎꿇기가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시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동안 교황이 주례하는 미사에서 교황에게 성체를 받는 이들은 일어선 상태에서 손이나 입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을 더 선호하는 베네딕토 16세는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으로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교황 전례예식을 관장하는 귀도 마리니 몬시뇰은 <로세르바토레로마노>와의 인터뷰에서 "무릎을 꿇어 성체를 영하는 방식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드러낸다"고 밝혔다.
"우리가 미사 전례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제 생각으로는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즉 미사의 전례를 현대 세계에 완전히 맞추려는 '토착화'의 경향입니다. 그러니까 '미사의 전례를 더 짧아져야 한다. 이른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가능한 한 전례에서 빼버려야 한다. 근본적으로 더 단순한 언어로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는 경향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사 전례와 미사 전례에 있는 성찬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사 전례는 내가 어떤 강연을 듣고 이해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이성적인 방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성찬에 몰입됨으로써만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찬은 여느 위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수천 년의 깊이로부터 그리고 필경 영원으로부터 나에게로 온 그런 성찬입니다." |
「이 땅의 소금」 P.208 |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트리엔트 미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한 번도 폐지된 적이 없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자의교서를 통해 트리엔트 미사의 유효성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사실 트리엔트 전례 전면 허용 당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정신과 개신교와의 교회 일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바오로 6세 전례를 '일반 양식'이라고 한다면 트리엔트 전례는 '특별 양식'이라고 봐야 한다"며 "특별 양식을 허용하는 것은 일치를 촉진하고, 교회의 풍부한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퇴위(사임) 발표
2013년 2월 11일 오전 11시(바티칸 시간), 교황청 대변인 성명으로 베네딕토 16세가 오는 2월 28일자로 건강문제로 퇴위한다고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 날 오전 8시(바티칸 시간)에 교황은 자신의 결정을 교황청 추기경단 회의에서 라틴어로 통보했다.
역대 교황 중에서 퇴위한 예는 1294년 즉위했다가 5개월 만에 추기경들과의 논의 끝에 퇴위한 성 첼레스티노 5세 정도라서, 가톨릭계는 충격에 빠졌다. 물론 가톨릭의 교회법상 교황도 퇴위가 가능하긴 하지만, 교황 측근의 스캔들과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교황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벌어진 상황이다.
기록상으로, 베네딕토 16세는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에 나온 퇴위 교황이자 역대 3번째 퇴위 교황이 되었다.
<퇴위 조서 전문> |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세 분의 시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삶에 매우 중대한 결심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이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듭거듭 제 양심을 성찰하면서, 저는 고령으로 더 이상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맞는 체력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이 직무는 그 영적인 본질에 따라,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기도와 고통으로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급변하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성인의 배를 이끌고 복음을 선포하려면, 몸과 마음의 힘도 필요합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저에게 맡겨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할 정도로 제 자신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행위의 중대성을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2005년 4월 19일에 추기경님들의 손으로 저에게 맡겨진 베드로 성인의 후계자인 교황의 직무를 사퇴하며, 이에 따라 2013년 2월 28일 20시부터 로마 주교좌, 성 베드로 좌는 공석이 되고, 관할권자들은 새 교황 선출을 위하여 콘클라베를 소집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저의 무거운 직무를 저와 함께 져 주신 여러분의 모든 사랑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 모든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최고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를 맡겨 드리며, 성모 마리아께서 추기경 교부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어머니의 어지심으로 그들을 도와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저는 앞으로 기도에 전념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를 온 마음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
- 바티칸에서 2013년 2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
"베네딕토 16세가 퇴위한 후 막후에서 신임 교황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자, 교황의 양립으로 미증유의 혼란을 경험했던 교황청에서는 이를 진화하려 노력했다. 또한 교황의 퇴위 발표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 벼락이 치는 장면이 촬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퇴위
차기 교황 선출과 관련해, 콘클라베는 교황직이 공석이 된 후에 15일에서 20일 이후에 개최하는 것이 관례라서 3월 15일에서 19일 사이에 열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사망이 아닌 퇴위이기 때문에 콘클라베가 빨리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가톨릭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성주간이 3월 25일부터 시작된다. 교황직이 공석인 상태에서 파스카 성삼일을 지낼 수 없으므로 되도록 빨리 교황을 선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교황청 내부에서 역시 법률 개정을 확정짓진 않아도 교황 선출관련 현행 교회법을 고쳐서 돌아오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에 후임자가 선정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았고 2월 23일 교회법을 개정한다는 베네딕토 16세의 공식확인이 있었다. 개정의 명분은 해당 법률이 '교황이 죽을 경우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과 교황위의 권력 공백상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베네딕토 16세의 의사가 반영됐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추기경들은 각자 체재하는 장소에서 현지 투표를 할 것이고 이들의 표는 성당 내 표결에서 2/3가 개표되기 이전까진 비밀에 붙이는 방식이다.
2013년 2월 27일 바티칸 광장에서 마지막 알현을 진행했다. 본래 겨울에는 실내인 바티칸 홀에서 하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마지막 알현이라는 점 때문에 5만 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고 최종적으로 무려 20만 명이 운집해서 이례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으로 옮겨서 진행했다.
퇴위 당일인 2월 28일, 추기경단과의 마지막 모임에서 "여러분들 가운데 다음 교황이 나올 것입니다. 나는 그분께 조건없는 존경, 순명을 바칠 것임을 이 자리를 빌어 약속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세간에서 제기된 막후 조종설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5시(한국 시간으로 3월 1일 새벽 1시)에 헬기로 교황의 여름별장인 카스텔 간돌포로 이동했다. 또한 오후 8시(한국 시간으로 3월 1일 새벽 4시)에 교황을 경호하는 스위스 근위대가 철수하고, 어부의 반지와 납봉 인장을 파기하는 것으로 베네딕토 16세의 재위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별장에 들어가기 전 마중 나온 신자들에게 교황으로서 한 마지막 인사말은 "나는 이제 순례자로서 마지막 인생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였다. 퇴임 후의 호칭은 '명예 교황(Pope Emeritus)'이며, '성하'라는 존칭도 계속 받을 수 있다. 옷도 현직 교황이 입는 흰색 수단을 입는다.
2013년 콘클라베
후임 교황으로 누가 선출될지 여부에 대해 세간의 관심은 최초의 흑인 교황이나 최초의 남아메리카 출신 교황의 선출 여부에 쏠렸다. 사실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될 당시에도 비유럽권 교황에 대한 강한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비유럽권 교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있었다. 또 베네딕토 16세가 선출 당시부터 이미 고령이었고 결국 악화된 건강문제로 퇴위한다는 점에서 고령 후보는 기피하고 상대적으로 연소한 60~70대 후보가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흑인 출신 교황 유력 후보로는 피터 코드워 아피아 턱슨(65세)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프랜시스 아린제(80세) 추기경이 거론되었지만, 추기경단의 지지여부가 변수이며 아린제 추기경은 여든이라는 고령이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비유럽권 교황 후보로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마르크 웰레(68세) 교황성 주교성 장관이 거론되었다.
2013년 3월 4일, 바티칸에서 추기경단 전체회의가 시작되었다.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이 주재하는 이 회의에서 콘클라베 일정이 결정될 예정인데, 소다노 추기경은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이 모두 모이기 전까지는 콘클라베 일정을 정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지 언론들에서는 3월 11일 정도에 콘클라베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모두 있는 115명의 추기경 전원이 참석한 추기경단 전체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갈등과 불화가 심해졌다. 개혁성향이 강한 미국 추기경단과 35년 만에 이탈리아인 교황의 등장을 바라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 특히 차기 교황을 유럽인으로 할 것인지 비유럽인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도 파벌이 갈려 콘클라베 시작일이 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임 교황께서는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 퇴임한 걸지도. 미국 추기경단들은 가톨릭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미성년자 성폭행 문제에 대해서 "새 교황은 성폭행을 한 사제들을 가톨릭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새 교황이 어떤 이름을 선택할지의 여부에도 관심이 쏠렸다. 전임 교황과의 연계라는 차원에서는 베네딕토 17세, 진보와 개혁성향의 교황이라는 차원에서 요한 24세, 사회정의 차원의 교황이라면 레오 14세,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수호하는 차원의 교황이라면 비오 13세, 서민적 풍모의 교황이라면 요한 바오로 3세 등등의 가능성이 나왔다. 대체로 베네딕토 17세나 요한 바오로 3세가 제일 유력할 것으로 관측되었지만 오히려 차별성을 두기 위해 바오로 6세가 그랬듯이 수백 년 동안 채택되지 않았던 이름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콘클라베는 3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초 15일에서 19일까지 밀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주님수난 성지주일을 코앞에 두고 콘클라베를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데 추기경들의 의견이 일치한 듯했다. 당시 유력한 후보로 유럽권에서는 밀라노 대주교를 겸한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 비유럽권에서는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 갤버스톤-휴스턴 대주교를 겸한 오딜로 페드로 스체레르 추기경이 거론되었다. 스콜라 추기경은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미국과 독일권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교황청과의 교류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교황청의 주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을지 불투명한 약점이 있었다. 반면 스체레르 추기경은 교황청 주류 추기경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중간 이름이 페드로(베드로)라 말라키의 환시를 믿는 오컬트 마니아들은 그가 교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막상 교황으로 뽑힌 이는 전혀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그래도 예수회 출신으로 교리면에서는 원칙주의자이며 교황청 내의 비기득권층인 비 이탈리아인이라는 점, 교황명으로 청빈한 삶을 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점 등으로 보아 개혁파의 입지가 강해지리라는 전망이 있었으며, 실제로도 화려했던 전통을 중시했던 베네딕토 16세와 차별화된 소박한 행보로 눈길을 끌었다.
퇴위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 선출된 후 2013년 3월,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을 방문해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과 만났다. 현임 교황과 전임 교황의 만남은 거의 600년 만이다. 개인 경당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신임 교황인 프란치스코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자 상석인 제대 바로 앞자리를 권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형제다"라고 말하며 베네딕토 16세와 함께 나란히 기도했다.
두 교황은 미사를 마친 뒤 전임 교황의 도서실에서 40~45분간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두 교황의 비밀 대화의 내용은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세속주의, 성소 급감, 오순절주의 운동으로 인한 중남미와 아프리카 가톨릭교회의 어려움 등 교황청이 직면한 현안에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이날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 16세에게 성모상을 선물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교황으로서 겸손과 온유에 관련된 많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라고 칭송했고, 베네딕토 16세는 이탈리아어로 연방 고맙다고 화답했다.
2013년 5월 2일, 퇴위 직후 카스텔 간돌포에서 머물던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으로 돌아와 마테 에클레시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7월 5일에는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바티칸 정원에서 열린 성 미카엘 대천사상ㆍ나자렛의 성 요셉상 제막식에 나란히 참석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날 두 교황은 바티칸을 수호하며 교회에 평화가 올 수 있게 미카엘 대천사와 나자렛의 성 요셉에게 전구를 청하였다.
2014년 4월 27일,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에 공동집전으로 참석하였다. 한 자리에 4명의 교황이 모인 역사적인 순간으로 화제가 되었다. 3명만 더 모이면 이제 킹덤하츠가 열린다 그 후 9월 28일 주일에 노인들을 위한 미사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존재를 '집안에 큰 어르신이 계시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윽고 10월 19일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식에 다시 공동집전으로 참석했다. 이번에도 3명의 교황이 모인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퇴위 후 주어진 '명예교황'이라는 호칭에 부담감이 컸는지 '베네딕토 신부'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기사 동양식으로 하면 태상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현재 독서와 손님 접대, 피아노 연주 등 소소한 일상을 누리고 있으며, 새로운 책을 더 이상 집필하지는 않는다고 전해진다.
2016년 7월 1일, 독일 저널리스트 페터 제발트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기술된 회고록 『마지막 이야기』의 9월 출간을 앞두고, 교황청 내부에 동성애 로비 집단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16일 만 90세 생일 때는 건강이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걷는 등 신체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으나 전과 다름 없이 책을 읽고, 사유하는 등 정신은 여전히 명료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생일 다음날인 17일에는 고향인 바이에른주에서 친형 및 지인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생일을 축하했다.
2020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사제, 독신주의 그리고 천주교의 위기>라는 책을 출간하며, 독신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 주장에 대한 논란이 일자 승낙 없이 책의 공저자로 기재됐다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
2020년 9월 2일부로 생몰년으로 레오 13세를 제치고 최장수 교황이 되었다.
2021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았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퇴위는 이성적인 결정으로 내려진 것이었으며, 잘한 일이라고 자평했다.
2021년 1월 8일부로 재위 기간보다 퇴위 기간이 더 긴 교황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10월 말에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1달 전 사망한 동료 사제에게 애도를 표하며 "내세에서 곧 친구들과 합류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를 두고 사망이 머지않은 상태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2022년 1월, 그가 과거 관할했던 독일 뮌헨교구에서 수십년 동안 성직자들의 성학대가 저질러졌으며, 당시 교구장이었던 그가 보고를 받고도 이를 묵인하고 대처를 적절히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베네딕토 16세 측은 보고서 내용을 검토를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반응은 싸늘한 편.
2022년 12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건강이 매우 위중한 상태라고 밝히면서, 신자들의 기도를 당부했다.
사망
결국 2023년을 하루 앞둔 현지시간 2022년 12월 31일 오전 9시 34분, 향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신의 퇴위 10주년을 불과 두 달 정도 남긴 시기였다.
장례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2023년 1월 5일 집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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