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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사진

by 두용이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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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사진

과거만해도 이미연 배우님의 열연으로

구국의 여걸로 불리던 인물로 알려진

고종의 정실 부인 명성황후 민씨는

남편 고종과 달리 실제 사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음

 

일단 현재로써는 황후가 사진을 촬영했다는건 사실인것이 맞음.

 

 

https://n.news.naver.com/article/003/0006878269

 

 

박 위원은 지난 5월 명성황후가

덕수이씨 집성촌인 광주군 대왕면 저푸리마을

(성남시 중원구 고등동)에 묵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후손 이재복(1930년생)옹을 고등동 자택에서 만났다.

이옹은 이렇게 증언했다.

 

명성황후는 두포(현 옥수동압구정동) 나루를 건넌 후

논현과 말죽거리를 지나 우리 집으로 오셔서

며칠 묵어가셨다고 한다.

 

당시 나의 백부가 덕수이씨 종손인

이종필 어른에게 양자로 가셨는데,

민승호의 부인 덕수이씨는 이종필의 고모가 되시며,

나의 백부에게는 대고모님이시고,

명성황후에게는 친정 올케가 되신다.

 

우리는 민승호 댁을 죽동궁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죽동궁 덕수이씨 할머니가 자라신 곳으로

죽동궁의 오라버니들도 이곳에 사셨고,

왕비께서는 올케의 친정으로 피해 오신 것이다.

 

다섯 대의 가마가 왔다는데,

황후께서는 가장 허름한 가마를 타고 오셨다고 한다.

황후께서는 고종의 어진 한 장을 가지고 오셨는데,

떠나시면서 그 사진을 우리 집에 주고 가셨다.

 

고종의 어진은 이만한(60×40) 정도였고,

훈장 같은 것이 달린 정장을 하셨다.

내가 어릴 때까지도 사진을 봤지만,

6·25 때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집 바로 아래에 살던 덕수이씨 가문의 다른 댁에는

왕후 사진이라고 전해오는 사진이 있었다.

크기는(A4용지를 가리키며) 이것보다는 컸던 것 같다.

옆으로 벌어진 모자(떠구지)를 쓴 것 같은데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정리해서 현재 존재하는 사진들의 경우 후보를 살펴보자면....

 

 

후보 1

 

비교적 최근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교과서에 소개되었지만

정황 상 구한말 제조상궁 박씨의 사진으로

현재 유력한 상황임

 

일단 옷차림이 왕비의 옷차림이 아니고

발을 내놓고 찍었다는게

왕실 법도 상 있을수 없는 일이였음.

 

 

 

후보 2

 

프랑스 르몽드지에 공개된 명성황후 사진,

저 뒤의 배경으로 흥선대원군,

고종 등이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진짜 명성황후 사진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왔음

 

하지만 의친왕(고종의 서자)

차녀 이해원 여사(1919~2020)의 증언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첩 초선(1849~1885)의 사진인것이 유력함

 

후보 3

 

구한말 그려진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하지만 그림의 원본에 대비전을 가르키는

"자전"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있는것으로 추정됨

 

정황상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명헌태후, 1831~1903)

초상일 가능성 역시 무시할수가 없음

 

 

 

후보 4

 

조선귀국현초상에 그려진 명성황후의 초상으로

시해 1년전인 1894년 그려진 그림,

하지만 너무 어려보이는 탓에

며느리 순명효황후(순종의 첫번째 부인)라는 추측도 있음.

 

 

 

후보 5

 

구한말 왕실 가족들을 그린 초상에 표현된

명성황후의 초상인데..확실한 근거가 없음

 

 

하지만 현재로써 가장 가능성이 높은

명성황후의 사진이 있긴 있음

 

 

바로 이 사진임

 

일단 현재로써 명성황후를

실제로 본 사람들이 묘사한 명성황후의 실제 외모 추정임

 

(1. 언더우드 부인의 증언)

 

"약간은 창백하고 꽤나 마른 체형으로 무언가 날카로운 인상과 명석하게 꿰뚫어보는 그녀의 첫인상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 누구든지 그 같은 얼굴에서 풍기는 힘, 지성, 강한 기질을 읽어낼수 없다.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활기, 소박함, 재치, 이 모든것들이 그녀의 표정을 밝게 해주었으며 단순한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구현해주었다"

 

(2. 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증언)

 

"키는 별반 크지 않고 살도 찌지 않았다. 오히려 날씬하고 얼굴이 갸름하다. 눈은 가늘고 눈끝이 위로 치솟아 언뜻 보기에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험한 얼굴은 아니다"

 

(3.을미사변 당시 낭인 히데오의 증언)

 

"나는 내실로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흰 저고리를 입고 하얀 바지를 입었는데 흰피부의 그녀는 많아봤자 25~26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가녀리고 체구가 작은 여인은 목각인형을 자빠트린 자세로 죽어있었는데 조선 팔도를 호령하던 왕후의 최후 모습이라고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

 

4. (언더우드 비숍의 증언)

 

" 왕비는 퍽 마흔살을 넘긴듯했고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다. 피부는 너무 투명해서 진줏빛 가루를 뿌린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였다. 대화가 시작되고 내용에 흥미를 가지면 그녀는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이들을 수하로 부리는 통치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5. (윤백영 여사(덕온옹주 손녀)의 증언)

 

"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이 흰 분이였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있어 "언짢은 상"이라고 어른들이 걱정하셨다"

 

 

즉 종합하면

 

1. 체구가 마름(황후는 출산을 5번 함)

2. 희고 고운 피부

3. 나이에 비해 매우 동안 (많아봤자 액면가 30)

 

 

정황 상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유력한 이유는 다음과 같음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 1917)

박은식의 "한국통사"(1917)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

에 각각 실린 사진들임

 

보면 알겠지만 유력한 위의 사진과 매우 닮았고 이 사진이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존재함.

 

(1) 해당 사진은 이승만의 저서 "독립정신"에 명성황후로 처음 수록된 사진임

 

(2) 사진이 공개되고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반론없이 명성황후로 소개됨 (남편 고종, 아들들인 순종, 의친왕, 며느리들이 살아있던 시기)

 

(3). 7년 후 이승만이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 2쇄본을 출판했을 당시에도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소개됨

 

(4) 1932년 잡지 "별건곤""근대조선 인물화보"에도 명성황후라고 소개됨. 40명의 인사 사진이 소개되었는데 사진이 없는 인물은 편지를 실었을정도로 신빈성이 높음.

 

(5) 명성황후를 만난 여흥 민씨 민영찬이 회고담에서 이 사진을 명성황후라고 수록함

 

 

무엇보다도 1940년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에서 을미사변에 참여한 낭인, 한국 통감부에서 황후의 얼굴을 기억하던 기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실은 사진임. 보다 시피 위의 사진과 매우 유사함

 

 

즉 정리하면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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